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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해병대기

 

海兵隊 略史 槪要

 

  한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에 신현준 중령을 초대 사령관으로 하여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 가운데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2개 소총중대(270명)와 본부(15명), 근무중대(70명), 방첩대(10명), 경리대(15명)로서 편성되어, 진해시 덕산비행장에서 380명의 적은 병력과 보잘 것 없는 장비를 가지고 창설되었다.

 


 

창설배경을 보면,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진압에 참가한 해군 임시함대의 함장인 신현준 중령이 "상륙군이 없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하지 못하였다"는 전투상보를 보고하자,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김성삼 대령에게 해병대 창설을 지시하게 되었다. 그 때 해군은 함정 세력으로 국내 정세의 혼란을 평정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의 자연 조건에 따라 수륙 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상륙 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의 무궁한 앞날을 보전하기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해병대는 탄생과 더불어 진주와 제주의 공주 토벌 작전에 출전하여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맡은 임무를 다하였으며, 민심 수습, 선무 활동 및 치안 확보로 진주시민과 제주도민에게 크나큰 신뢰를 안겨 주었다. 한국 동란이 일어나자 해병대는 어린 나이인데도 1950년 7월 16일에 장항·군산·이리 지구에서 첫 전투를 치루었으며, 그 뒤 함양· 진주지구 전투에서 적을 막고 쳐부수면서 효과있는 지연전을 벌였다.  한국동란 이후 후퇴를 거듭해 온 아군은 50년 8월 1일경부터 낙동강 교두보선을 확보하고 반격작전에 대비하고 있던 중, 해병대 김성은 부대(1개 대대)는 경남 진동리 서방 고사리지역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군 제6사단의 예봉을 꺽고 침공을 저지시켰으며, 한국전쟁 발발이후 대대 규모가 최초로 대승한 전과를 세움으로써 대통령으로부터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그 이후, 킨(KEAN) 특수임무부대의 대규모 반격작전에 참가한 해병대는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적을 격퇴하고 마산 - 진동리로 통하는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을 더욱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동년 8월 17일 통영지구 전투에서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의 지원 엄호하에 장평리 해안에 한국군 최초 단독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적 7사단 1개대대를 격멸함으로써 전략 요충지 마산, 진해로의 적 해상 봉쇄기도를 좌절시켰던 바 당시 외신기자들은 한국해병대의 용맹성을 "귀신잡는 해병대"라고 격찬하였다. 낙동강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해병대를 선두로 하여 세계 전사에 찬연히 빛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261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동년 13일부터 15일까지 48시간 동안 항공모함 함재기 200대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실시한 후, 9월 15일 06 : 30분 미 해병대 제5연대 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월미도 녹색해안에 상륙하였으며, 동일 17 : 30시부터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는 400여 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적색해안과 청색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시가지 소탕전을 전개, 해안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한·미 해병대는 9월 18일 경인국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행주산성을 탈환하였으며,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함께 서울탈환을 위한 선봉부대로서 서울 서측방에서 수도 중심부로 공격을 게시하였다.

한편, 미 육군 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는 서울 남측방과 동측방에서 우회 포위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서측방 돌파작전시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미해병대 제5연대와 함께 수색방향으로 진격하여 북괴군의 서울 사수 방어선인 연희동 104고지 일대에서 2차에 걸친 치열한 쟁탈전 끝에 적을 격퇴시킴으로써 수도 탈환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북괴군은 최후 방어선인 연희고지군 전체를 탈취당함으로써 전투의지는 저하되었고 급기야 서울을 포기하고 의정부 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9월 25일부터 실시된 시가지 전투에서 한 해병대 제2대대는 마포, 원효로를 거쳐 용산경찰서를 점령하였으며 삼각지 - 남영동 - 서울역 일대의 잔적을 소탕한 후 서울시청에 돌입하여 적을 완전소탕하고 광화문을 경유하여 9월 27일 06 : 10 분에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한편, 김성은 부대는 9월 25일 후속제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해병대 제5대대로 개칭하고 북악산 일대에서 시가지 소탕전을 전개하였으며, 한 해병대 제3대대는 단독작전으로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려던 적 2개대대를 격퇴시킨 후, 김포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이로써 9월 28일 저녁을 기하여 서울시는 아군에 의하여 완전히 탈환되었고, 9월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맥아더 원수, 국회의원 및 정부요인들이 서울로 입성함으로써 전 국민이 열망하는 역사적인 수도 환도식을 중앙청 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동년 10월부터 국군과 유엔군이 승승장구 북진을 개시하였으며 해병대도 묵호 및 원산에 상륙하여 함흥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원산과 함흥에서 철수하여 진해로 집결하였다.

진해에 집결한 해병대는 동년 12월 20일 해병대 제1연대와 독립 제5대대로 재편성하고 영덕 및 안동지구로 출동하여 북괴군의 남침진로를 차단하던 중 51년에 접어들면서 다시 북진작전을 재개하여 독립 제5대대는 서울재탈환 작전을 위해 인천에 상륙, 김포지구작전을 전개하여 김포반도를 장악하였으며, 해병대 제1연대는 중동부전선에 투입 영월, 홍천, 화천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51년 6월 초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한 후, 캔사스(KANSAS)선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북괴군 12사단 정예부대가 중동부 산악지역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전략적 요충지 도솔산(1,148고지)을 난공불락의 진지로 구축하고 고수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세계 최강의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가 공격작전을 감행하였으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하고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투입되어 피와 땀의 혈전 17일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24개 목표를 점령함으로써 불과 1개연대 규모로 적 사단병력을 무찌른 기록적인 도솔산의 전승기록을 낳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교착상태에 빠진 우군전선의 활로를 개척하였으며 이 대통령께서는 아 해병대를 방문하여 "무적 해병대"이라고 칭하면서 부대 표창과 휘호를 하달하였다.

51년 8월 31일 한국전쟁이 교착단계에 접어든 직후 대규모 작전인 펀치볼지구 전투에 참가한 한국해병대는 양구 북방 만대리 분지(POUNCH BOWL) 북단 능선 일대 고지군인 924, 1,026고지(일명 김일성, 모택동 고지)전투에서 북괴군 제1사단 3연대를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격멸하고 4일 만에 고지를 완전 점령하여 만대리 분지(POUNCH BOWL)를 장악함으로써 한국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크게 과시하였다.

한편, 동·서해안 봉쇄를 위하여 1951년 2월부터 휴전시까지 해병대는 1개연대 규모의 병력을 서해안(백령도, 교동도, 연평도, 석모도, 초도)과 동해안(여도, 양도)에 상륙시켜 주요 전략도서를 확보하였으며 특히 함경북도 명천에서 3.6km 떨어진 양도작전에서 독립 제43중대는 적 상륙부대 1개대대를 완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52년 3월 17일 판문점, 휴전회담을 둘러싸고 한치의 땅도 더 확보키 위한 피아간의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수륙양면 방어의 중책과 수도서울 방어에 역점을 둔 MIX MASTER 계획에 따라 해병대 제1연대는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 장단지구로 이동하여 해병대 제1전투단으로 증편하였으며, 약1년 4개월간 임진강을 배수진한 장단(사천강) 및 연천 지구에 투입하여 군사분계선을 아측에 유리하게 확정짓도록 하였으며,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 - 문산축선을 지키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을 맞아 통한의 휴전선을 남긴 채 정전을 맞이하였다.

해병대는 한국전쟁 발발이후 휴전시까지 만 3년간 20여 개의 전선을 전전하여 「常勝不敗 의 神話」를 남긴 전통을 수립하면서 적사살 2,398명을 비롯하여 귀순, 포로 등 39,419명의 인적손실과 전차와 야포를 비롯한 장비 및 대·소화기 등 무려 34,340점의 물적손실을 적에게 입히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한편, 5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하여 1회 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휴전이후에도 해병대는 계속 서부전선에서 수도 방위 및 서해 5개도서 방어중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55년 1월에는 대망의 상륙사단을 창설하였다. 이렇듯 싸우면서 자라 온 해병대는 계속 국가의 전략 기동 예비대로서 부과된 사명을 다하였다.

1965년에 접어들면서 자유우방인 월남이 공산측의 사주를 받아 광분하는 「베트공」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국민의 정의감과 단호한 결이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공산세력을 분쇄하여 영원한 자유와 정의를 위하겠다는 세계사적 사명과 의의를 지니고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파병을 단행하게됨에 따라 해병대는 1965. 1. 5일 제1독립공병중대를 편성하여 3월 10일 파월한 후 1965. 9. 20일 해병대 제1사단 제2연대를 기간으로 새로운 전투여단인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하여 최초의 전투부대로 10월 3일 파월하였다.

건군사상 처음으로 해외원정하는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파월한 청룡부대는 1965. 10. 9일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1965. 12. 23일까지 「캄란」,「판랑」,「나트랑」방어전을 수행하다가 「투이호아」로 이동하여 「청룡1호」작전(여단급)을 전개하여 공산군의 해상보급추진 요람지인 봉로만 일대에서 준동하던 월맹정규군 약 1,500명을 완전 소탕함으로써 월남 대동맥인 1번 도로를 개척하고 월남 3대 곡창의 하나인 「투이호아」평야를 평정하였다.  특히, 「해풍」작전에서 고 이인호 소령은 적이 던진 수류탄을 안고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부하들을 위한 그의 초인적인 희생정신은 해병대 뿐아니라 60만 국군의 귀감이 되었다.

66년 8월 17일에는 「북극성」작전을 전개하면서 추라이지역으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황금」,「비봉」,「용안」작전을 전개하여 적정이 험한 추라이지역내 전술책임지역을 확보하였으며, 특히 짜빈동작전에서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는 월맹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의 인해전술 및 파상적인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도 중대전술 기지를 사수한다는 일념으로 육박전 및 역습을 실시하여 4시간의 사투 끝에 그들을 격퇴, 적사살 243명의 대전과를 올림으로써 월남전 사상 최대의 전승을 기록하였다. 당시 짜빈동대첩을 직접 취재하거나 전해 들은 사이공의 3백여 외신기자들은 「신화를 남긴 해병대」이라는 표제하에 대서특필로 보도하였으며, 이 전공으로 중대원 전원 1계급 특진과 한·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받았다.

67년 12월 12일에는 호이안지구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괴룡」,「용진」,「서룡」,「황룡」작전을 전개하여 지역내 적을 98% 소탕하고 호이안지역을 평정하였다. 이 지역 작전에서 다낭 서남방 25km 지점인 「쿠엠쿠」 강가에서 적의 식량창고를 발견하여 월남전 사상 최대의 식량(275톤)을 노획한 승룡 7 - 21호 작전, 난공불락이었던 월맹정규군 36연대의 요새지인 「고노이」섬을 점령 확보한 승룡 15 - 1호 작전, 인천상륙 작전 이래 처음으로 한·미 해병대가 전개한 월남전 사상 최대의 여단급 상륙작전(한 해병대 RLT, 미 해병대 BLT)인 「베리아」반도 상륙작전 등은 해병대사에 길이 빛날 기록들이다.

작전과 민사심리전에 걸친 청룡의 활약으로 파월 6년 5개월간 여단급 작전 55회와 대대급 작전 113회를 비롯한 151,437회의 소부대활동을 통하여 9,619명의 적을 사살하고 포로 687명, 귀순 569명, 용의자체포 2,981명, 개인화기 4,000정, 공용화기 284문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리는 한편 8,810톤의 구호활동, 968,296명의 대민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지원, 1,593동의 건설지원, 450,064명에 대한 친선활동 등 대민봉사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3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그 후 해병대는 창설 24년 6개월 만인 1973년 10월에 국방부 훈령 제157호에 의거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는 역경을 맞았으나 국가와 민족에게 충성된 군대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77년 1월 1일 도서방어부대를 모체로 한 제6여단과 양성 교육을 담당하는 제2훈련단을 창설하게 되었다. 청룡부대로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개선 귀국한 뒤 서부전선의 김포반도에 다시 배치된 제2여단을 모체로 하여, 1981년 4월 16일에 제2사단을 창설하였다.

한편 해체된 지 14년 만인 1987년 11월 1일에 해병대 사령부가 다시 창설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1990년 10월 1일에 국군조직법이 통합 이전과 비슷하게 제정·공포됨으로써 해병대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이름 그대로의 법률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뒤 1992년 12월 1일에 모든 해병대 부대를 상륙작전 위주로 운영하고, 모든 예하부대를 지휘하여 연합사 전략에 비부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연합해병대사령부(CMFC)가 창설되었다. 해병대 창설 뒤 처음으로 제1사단과 제6여단의 작전권을 포함하여 연합해병대사령부로서 해병대사령부가 완전한 부대 지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해병대사령부는 해병대 부대의 작전, 교육 훈련, 행정 등 부대 지휘의 구심점 역할을 할 목적으로, 1988년 4월 15일에 국방부의 '재경부대 교외 이전 계획'에 따라 새 사령부를 경기도 발안 지역으로 결정하여, 1992년 4월 1일에 사령부를 착공, 1996년 4월 6일에 이전함으로써 새로운 해병대 역사의 요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어서 1994년 4월 15일에 해병대 지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하여 해병대사령부가 증편되었으며, 1994년 10월 15일에는 제1사단 해안지원단을 해체하고 '상륙지원단'을 창설하여, 해병대 부대에 대한 군수 지원을 전담하는 부대로서 토대를 쌓아 올렸다.

최근에는 해병대에 알맞은 부대 구조로 개선하기 위하여 1996년 11월 1일에 제2사단은 155미리 자주포, K-3 경기관총과 K-4 고속유탄기관총 등을 도입하였으며, 부대별 기능별로 균형있는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정비대대와 수송대대를 창설하였고, 기간으로 균형에 맞지 않게 편성되어 있던 3개 연대와 포병대대를 표준으로 편성하여 증편하였다. 제6여단은 개전 초 즉응 전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현지 동원 가용 자원으로 도서 지역 안에서 전시 편성이 완료되는 조직의 개념으로 개편하고, 정비중대를 창설하여 자체의 전투근무 지원 능력을 보강하였으며, 제6여단 예속의 연평부대를 실질적인 지휘가 가능하도록 사령부 예속의 직할부대화 하였다. 또한, 해병대의 유일한 교육 부대로서 해병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2훈련단의 교육 부대에 알맞도록 '해병대 교육단'으로 개편하였으며, 교육 부대에 알맞도록 '일반형 참모' 형태에서 '부장형 참모' 형태로 직제를 개편하였다. 상륙지원단은 명실상부한 해병대의 전투근무지원 전담부대로 육성되도록 첫 단계로 전시 편성 병력을 갖춘 부대로 기능 보강을 하였다.

1998년 3월 1일 해병대 교육훈련단은 사관후보생 54기 이후 25년간 중단되었던 해병대 사관후보생 양성과정을 해군사관학교로부터 인수하고 장교교육대를 장교 교육대대로 개편하여 예하에 장교기초반 중대와 사관 후보생 중대를 편성하였다. 정통성있는 해병대 장교 양성교육을 해병대 주관으로 실시함으로써, 병·하사관·장교를 양성하는 최강부대의 해병대 교육훈련체제가 확립된 실질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한 시대의 역사가 미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듯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창설된 해병대의 발자취는 온갖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불타는 용기와 끈질긴 인내로써 이를 극복하면서 6·25와 월남전에서 구국의 선봉장이 되어 「무적 해병대」,「귀신잡는 해병대」,「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영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우리 선배 해병대원들의 땀과 피와 그리고 목숨바쳐 쌓은 찬란한 금자탑이었으며, 오늘에 사는 우리 해병대원들은 위대한 선배 해병대원의 혼이 담긴 역사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며 고단했던 한 때의 역사를 교훈삼아 현 시대가 요구하는, 국민에게 믿음과 사랑을 받는 최강 해병대로 승화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막강한 해병대의 「常勝不敗」의 전통은 영원히 살아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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