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의 여전사들!

by 관리자 posted Apr 0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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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김현숙 초대병과장을 중심으로 여자배속장교 출신들이 주축이 됐던 육군 여자의용군보다 먼저 여자의용군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이 있다. 여군단 창설로 이어진 육군 여자의용군과 달리 그 명맥이 잠시 단절되기도 했지만, 조국에 대한 충정으로 전선을 선택한 해군·해병대 여자의용군이 그들이다.

1950년 8월 당시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제주도의 중학교 학생과 교사·청년 등 3000여 명을 4개 기로 모집해 3개 보병대대를 증편했다. 당시 해병대는 창설된 지 1년여가 지나지 않아 해군참모총장의 작전 지시와 행정 지시를 받았고 복장도 해군과 동일했다.

1950년 8월 31일 입대한 제4기생 중 126명이 여자의용군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여학생들(당시 제주에는 여학교로 중학교 4년제의 제주여중과 신성학원 2개가 있었고 한림중학은 남녀공학이었다)이었으며, 교사양성소 학생 20여 명(제주여중 4년을 졸업하고 양성소를 수료하면 교사자격증을 부여하는 제도가 있었다)과 현직 교사도 일부 있었다.
교사들은 미혼만 선발했다.

당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을 비롯한 해군 당국은 일선에 출동하는 남자해군들을 대신해 여자들에게 후방지원 업무를
담당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 아래 입대를 허용했다고 한다. 해군 여자의용군들은 적극적으로 지원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대한 경우도 있고, 한편으로는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의무감으로 지원한 경우도 있었다.

해군·해병대 여자의용군의 입대는, 같은 해 9월 1일부로 창설명령을 받고 9월 4일 입대식을 실시한 육군 여자의용군보다 약 1주일 빠른 것이다. 육군 여자의용군 교육대와 해군·해병대 여자의용군을 통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여성들의 조국에 대한 깊은 충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M1소총과 칼빈 소총을 휴대한 단독군장으로
제식교련·총검술·사격훈련·포복훈련 등 남자와 동일한 훈련을 받았으며, 사격장에서 실제 사격훈련도 실시했다.
1950년 10월 10일 40여 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장교 4명, 예비역 조장(예비 상사) 2명, 예비1등병조(예비 중사) 7명, 예비2등병조(예비 하사) 15명, 예비1등수병(예비 상병) 34명 등 총 71명이 임명장을 받았다.

이들은 해군본부(당시 부산 소재)와 통제부(해군병원 포함 진해 소재)에 배치돼 간호원·홍보요원·예비서무사의 업무를 수행했고, 일부는 위문공연단(무용수)을 인솔하고 극장 섭외 등의 업무에 종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50년 11월부터 한두 달 간격으로 본인 의사에 따라 제대하기 시작해, 정전회담이 시작돼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을 때인 1951년 7월까지 장교 4명을 제외한 전원이 제대했다.

이들 장교 또한 1955년 1월 17일에 2명이 전역함으로써 해군에 여자의용군은 1명도 남지 않게 됐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여군으로서의 맥을 이어가는 육군과 달리 해군·해병대 여자의용군은 이후 40여 년이라는 휴지기를 보냈다.

1999년 해군사관학교에 여생도 21명이 최초 입교함으로써 오랜 침묵을 깨고, 본격적인 해군·해병대 여군 시대를 열었다.
2001년 7월 해군·해병대 최초의 여군 장교 20명이 임관했고(사후96기), 2003년 10월에는 해군부사관 39명도 최초 임관했다.
2001년 11월과 2004년 2월 각각 여군 장교와 여부사관이 해군 최초로 함정에 배치됐고, 마침내 2003년 5월에는 여군 장교가 전투함에 승선하기에 이르렀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낳았다면 해군·해병대 여자의용군은 조국을 지켰다.
오늘도 대한민국 바다의 여신들이 테티스의 너른 품으로 우리의 영해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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