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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일 해병중장 / 해병대 제17대사령관
제8대 해군 제2참모차장 으로 1986년 9월 1일 취임했던 박 장군은 취임후 자신도 노력한 모군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이 이루어 지는 최종단계에 접어들어 취임 2개월후 다음과 같은 애 간장이 타들어 가는 가슴 설레는 일에 직면한다.
각군 작전 책임 부서장이 총원 참석한 가운데 재 창설될 해병대 사령부 명칭을 정하기 위한 합참 전략
회의에 참석한 박구일 중장은 합참에서 마련한 1개 안(해군 상륙군 사령부)과. 해군본부에서 낸 1개 안(해군 해병사령부)및 해병참모부 에서 낸 1개 안(해군 해병 상륙군 사령부)등 3개의 안중 1개의 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주최측인 합참에서 박구일 중장에게 어떤 명칭이 좋으냐 물었을때3가지 안이 다 좋지만 해병 이라고 하면 개 개인을 뜻하지 조직체가 아니므로 해병대 로 표현해야 할것 이라고 말한 것이 합참에 참석한 잔 작전 부서장들의 공감을 불러일어켜 결국 합참에서는 “해군 해병대 사령부”로 단일화 한 안을 국방장관 결재에 회부 되었는데, 결재에 회부된 그 명칭“해군 해병대 사령부”을 대하게 된 정호용 국방장관은 “해군” 이라는 머리글자를 지워 버리고 옛 명칭그대로 “해병대 사령부” 로 고쳐 결재 하여 대통령의 최종 결재를 득했던 것이니 그 기간의 애 간장이 타들어 가는 가슴 설레는 일을 박장군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후일 정호용 국방장관은 장관으로서 해병대 재 창설 명칭을 처리할때 자신은 해병대 편이 였다고 회고 하며, 해병대의 전통과 사기를 고려한 효율적인 판단이라 생각되어 “해군”을 삭제하여 버리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내게 되었 다는 회고 담과 그 사안이 되두 되었을때 실명을 거론치는 않았으나 장관실을 해병대 출신 전직 국회의원 몇분이 방문한 적이 있다고 회고 했다. 청와대 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던날 마지막 브리핑을 했던 박구일 장군은 “좋았어!!” 하며 흔쾌히 결재 서류에 싸인을 한 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특별지시를 받고 두눈에 눈물이 핑 돌많큼 감격을 했다고 한다. 잔인하게 머리와 팔다리를 잘라 없애 버리고 몸통만 해군에 통합시킨 박정희 대통령과 비교할때 해병대로선 감읍하고 다행한 일이다.
즉 첫째. 공부를 많이 하여 상륙작전 전략을 개발하라!
둘째. 김포에 있는 2사단을 2년마다 교체하여 상륙훈련을 시켜라!
셋째. 해병대 대원들이 싸움박질을 너무 많이 하지않도록 하라!
적과 싸울때 용감하게 싸울때를 대비하여, 의 세가지 지시사항 을 전 해병대 장병에게 교육을 통해 철처히 주지 시키라는 내용이 였다.
그로 부터 1주일후 국방부 에서 개최된 전군 지휘관 회의 에서 국방부 브리핑이 끝난후 건의 사항 시간에 정호용 장관이 해병대 사령관 할말이 없느냐? 고 물었을때 재창설을 도와준 고마움에 “해군”자 까지 떼어 준 정부의 고마움에 ★ “요새 170만 해병대 현역과 해병대 예비역 그리고 해병대 가족들이 매일 청와대 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 있다”★ 고 말하자 대통령을 위시한 전군 지휘관들이 폭소의 도가니로 변하여 해병대 재 창설을 축하 하여 주었다 한다.
박 사령관은 제8대 제2참모차장과 제 17대로 이어진 해병대 사령관, 재 창설된 초대 해병대 사령관 이라는 직함의 홍복을 누린 사령관 이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해사 12기로 입교 30명의 동기생과 해병대로 전과 하여 68년 4월 월남전에 참전 5대대 작전장교 을 거쳤으며, 1사단 7연대장 시절 극심 했던 부.마 사태를 진압하기위해 부산지구 계엄군 해병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슬기롭게 사태를 조기 수습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후일 공수부대가 진압에 들어갔던 광주사태와 해병대가 진압에 들어간 부.마 사태가 해병대 지휘관 들에게 대비 되어 조명 되기도 한다. 박구일 사령관은 14-15대 지역구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해병대 중앙회 부총재겸 사무총장을 역임 하셨다. ▶해병대 명인 기인전(정채호 서)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