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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3 20:52

해병대해체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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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7월초 해병대 사령부에서 "지휘관 회의"가 있었다. 1973년도 전반기 부대업무 실적보고 회의이다. 이때 나는 해병 도서경비부대장으로서 이 "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다. 이 "지휘관 회의"는 이병문 사령관의 임기가 6월 말로 끝나게 돼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사유로 중임이 된 후의 첫 "지휘관 회의"이다.
 
부사령관의 언질
나는 "지휘관회의"가 끝나고 사령부 현관을 나오는데 부사령관을 우연히 만났다. "이 대령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지" 하면서 부사령관은 자기 승용차를 타라고 했다. 우리는 시내의 작은 일식집에서 간단히 식사겸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부사령관이 나에게 "이 대령 인제 옷 벗을 생각하고 좋은 직장을 알아보는 게 어떤가?" 라고 청천벽력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리인지, 또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어서 멍 해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앞으로 4, 5년은 더 해병대 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나에게는 그 말은 얼토당토한 소리로 들렸다.  그런 나에게 부사령관은 계속 무슨 말을 할 듯 하면서 끝내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 이상 더 묻지 않았다. 단지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구나 하고  추측만 했을 뿐이다. 이때 그가 나에게 말할 듯 하면서 말 안한 내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해병대의 해체였다. 
 
그날 밤 숙소에서 자고있는 나에게 야밤에 사령부에서 전화가 왔다. "부대에서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침 6시에 인천항에서 해군 함정이 대기하고 있으니 그걸 타고 부대로 즉시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부대에서 무슨 사고라도 난즐로 생각되어 뜬 눈으로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조바심하는 마음으로 해군의 구축함으로 일반 선편이면 10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3시간만에 '백령도'에 도착했다. 부두에 장교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뭐 있어?"하고 우선 나는 그들에게 급히 물었다. "이상 없습니다"하는 그들의 대답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 무슨 일일까? 틀림 없이 무슨 일이 있다했는데? 궁금 속에 아무에게도 내색을 할 수 없는 하루가 지났다.
 
사령관의 특별담화
다음날 아침 일찍 사령부에서 전문이 왔다. 아침 10시에 사령관의 특별 담화문 발표가 있으니 전장교는  경청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부대의 전 장교들을 오전 10시 10분 전까지 장교식당에 집합시켰다. 10시 정각 사령관의 담화문 내용이 긴급전문으로 왔다. 나는 통신장교에게 그 긴급전문을 읽게 했다.
 
"1973년10월10일을 기해 해병대 사령부와 직할부대를 해체한다"는 엄청난 우리가 전혀 예상도 못했던 폭탄선언 같은 그런 내용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무슨 법 개정도 없이, 군군조직법의 개정도 없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마음대로 국군조직법에 의해 편성된 역전의 해병대, 상승의 해병대를 해체한다면 이건 완전히 독재가 아닌가? 나는 분통부터 터졌다. 무슨 놈의 나라가 이런가?
 
우리는 전부 어안이 벙벙해서 마치 시간이 일시에 정지한 것 같은 느낌 속에 있었다. 무슨 날벼락인가?해서 이다. 나는 장교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묵묵히 앉아있었고 그들 중의 몇몇 장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슬퍼서 였을까? 원통해서 였을까? 또는 앞으로의 삶이 염려돼서 였을까?
 
이렇게 우리 해병대는 우리가 이룩한 박정희 정부에 뒤통수를 얻어 맞고 어이 없게도 맥없이 해체되었다. 그것도 3개월만에! 우리가 어떻게 이룩한 해병대인데! 그리고 아뭇 소리도 못했다. 
 
참새도 죽을 때는 "꽥" 한다는데 우리는 전부 입 가진 벙어리가 되었다. 그 동안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불리웠던 해병대가 입으로만 귀신을 잡고 있었단 말인가? 그랬다면 그 동안 흔히 듣던 개병대가 아니었던가? 주인에게 용도폐지되어 도살당하는 똥개? 그렇지 않으면 허풍대가 아니었던가? 
 
사실 이런 사태는, 해병대 사령관이 뚜렷한 사유도 없이 중임되었을 때부터 우리는 무슨 예기치 않은 변동이 있을 것을 예측했어야 했으나, 그것은 부사령관(이봉출 장군)이 사령관으로 당연히 보임되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게 됀데에 대한 어떤 의구심을 가젔어야 했으나. 우리는 너무 근시안적이었고  또한 우물 속의 개구리같았기 때문에 사령관의 중임을 아무 의구심없이 체념하고 받아드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그 동안의 해병대의 내부적인 여러가지 동향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해병대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데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대대작전장교가 해병대 사령관이 되고 그 당시의 대대장이 부사령관이 되었으니, 이것이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해병대의 선후배가 顚倒되었으니 사실 거꾸로 된 것이었다.  
 

 

 
"해병대의 해체"에 대하여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가시책에 의해서 해병대가 해체되었으니 그 해체에 대하여 아무도 책임질 당사자는 없을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해병대 수뇌부는 스스로 자기들, 수뇌부로서의 해병대의 운영, 관리, 및 유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으니 해병대 사령부와 그 직활부대가 해체되는데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이 참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나는, 아니 우리는 그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들은 그렇게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까?   
  
해병대 사령부와 그 직할부대가 해체됨에 따라 우선 수 많은 고급장교들이 전역하게 되었다. 전역대상은 대부분 한국전쟁 참전장교들이다. 특히 해간 3기생과 7기생 그리고 9기생들이 위주인 것 같았다.
 
해간 3기생 중 장군은 7명인데 그들 중에는 하늘의 별도 있지만 편가르기에 편승해서 별을 단 똥별도 있고 개인의 심복이 돼서 치사하게 별을 단 더러운 별도 있다. 이런 망군적 풍조는 해병대를 위해서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만 있었고 해병대는 그들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치사하고 더러운 별들은 자기들이 똑똑해서 별을 달았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 외는 전부 고참 대령들이다. 최소한 해간 3기생은 20여 명은 족히 될 것이고  해간 7기생과 9기생까지 포함하면 대략 50-60명의 대령급 장교들이 전역될 듯 했다. 우리는 복받처 오르는 분노를 눈물로 삼키면서 내쫓기는 식객같이 주섬주섬 전역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병대의 갑작스러운 해체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겨있는 예하부대에 사령부(인사참모부)로부터 전역원서를 언제까지 제출하라는 공문이 왔다. 물론 당연한 행정절차이겠지만 기가 막히는 것은 만일 기일내에 제출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전역발령을 내갰다는 협박장 같은 내용의 단서가 붙어 있었다. 우리는 이 문서를 보고 모군으로부터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 공문은 너무나 경솔하게 분별없이 작성된 내용이어서 그 내용을 알게 된 장교들은 한결같이 분노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심중치 못한 인사참모부의 경솔한 처사인가? 그렇다면 전역원서를 받는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전역발령을 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해병대 해체 소식에 말 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는 우리를 이 공문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정말 소갈머리가 없는 사령부의 인사처리 방법이었다. 우리는 이 공문서를 보고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군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근무하던 모군, 해병대인가?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똥별들에게는 자기들만 있었고 해병대는 없었던 게 어닌가?
 
그 뿐만 아니다. 후일에 알게 된 기막힌 사실은, 비록 개인에 극한된 문제이지만, 이들은 미 육군대학(U.S.A. Command & General Staff College)에서 1년 간의 군사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능한 장교를 목포막사로 보직발령을 냈었다. 이런 처사는 그대로 있겠으면 있고 싫으면 옷벗고 나가라는 소리가 아닌가?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아무리 도미유학장교에 대한 질시의 골이 깊었기로소니 이건 너무한, 상식에서 벗어난 처사가 아닌가? 그러니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만 있고 해병대는 없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당연하지 않은가?
 
이에 반하여 육군은 어떠하였는가? 대육군의 수많은 응시자 중에서 미 육군대학 유학장교를 엄정히 선발하여 유학 보냈고 귀국 후의 그들은 일정기간 육군대학에서 교수근무를 마치고 요직에 등용되어 대부분이 장군 진급을 하였다. 
 
육군 총장도 미 육군대학출신이 많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기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모군 해병대에서는 유배나 다름 없는 한직으로, 목포막사로 쫓아?보내고 있으니 이들이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그런 인사처리를 했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비싼 비용을 드려 미국 유학을 보냈단 말인가? 
 
이런 무지하고 무책임한 참모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올바르게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평소에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니 해병대가 그 꼴이 된 거 아닌가? 그 장교는 모군으로부터 버림 받은 듯한 충격으로 그만 이 한국땅을 떠나서 이민을 가고 말았다. 이 얼마나 그 개인을 위해서나 또 해병대를 위해서 서글프고 또 허망한 일인가? 이런 것들이 별을 달고 있었다니 과연 누구한테 무엇을, 어떻게 하소연할 수 있었을까?
 
이런 자들이 해병대의 정책 입안자고 또 시행자였으니 해병대의 꼴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는가?하는 자소하는 생각마저 나는 들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해병대 해체는 국가적으로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이득을 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처사는 상식으로도 이해가 안갈 뿐만 아니라 그것도 얼마되지 않는 예산절감을 위해서라니, 이건 너무나 근시안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고 또한 그로 인한 막대한 소실은 국가적으로, 그리고 해병대의 입장에서도 어떠한 액수로도 그 손실은 비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으로도 보상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해간 7기생들은 그 수가 해간 3기생의 수와 같이 많을 뿐더러 한국전쟁에 참전한 우수한 장교들이 많았다. 한국 전쟁 중 서부전선에서 우리(해간 3기생)가 중대장할 때 그들은 소대장으로서 적과 직접 전투하면서 해병대의 정신을 배웠고 또한 해병대의 전통이 무엇이라는 것을 직접 보고, 듣고, 그리고 체험하며 터득했던 것이다.
 
그들 속에서 해병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 해병대 사령관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것으로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중도에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지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이로 인하여 해간 7기생 중 장군은 2명만 배출되었을 뿐이다. 
 
이때 어떻게 해병대가 이렇게 갑자기 허망하게 해체되게 되었는지 누군가 우리에게 설명헸어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 이에 대해 책임을 졌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우리의 선배들, 특히 해병대 사령관출신들에게 터뜨렸다. 그때의 우리에게는 여기에 대한 해답이 무엇 보다 아쉬웠다.
 
해병대 군복을 벗드라도 그 이유나 알고 벗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 그때의 우리들의 생각이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분노가 다시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는데 그때는 어떠 하였는지 표현할 수도 없다. 
 
미국 해병대가 그 긴 200여 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외적과 싸운 것 보다 군 내부의 적과 더 많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그들로부터 들었을 때 우리에게는 그것이 남의 일로,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이웃나라의 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와서 우리를 해체라는 절망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처럼 우리에게 "유비무환"이라는 현인의 말이 그렇게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아직까지 나에게 없었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없었을 것이다.
 
"유비무환"은 어떤 구호에 끝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행동이며 또한 실천이다. 그러면 해병대 수뇌부는 평소에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 사령관출신들은? 전관예우라는 울타리 속에 안주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았으면 유비무환 못해서 유구무언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중동하고 있었단 말인가? 누군가 이에 대하여 대답을 했어야 했다. 
 

 

 
1.  "해병대 해체"의 遠因
 
해병대는 특히 육군과는 과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본의아니게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공연한 허세를 그들에게 부린 일도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우리는 해병이다"라는 큰 자부심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은 이것은 약자의 변명이고 또한 소수집단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겠지만 그런 우리의 심중치 못한 언행이 결과적으로 해병대호라는 배를 침몰시키는 먼 원인 중의 하나로도 생각할 수 있다. 
 
 (1)  육군에 대한 혐오감
우리가, 해병들이 육군을 싫어하게 된, 무엇 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국 육군 제6사단의 후퇴
 1951년 4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일선연대로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중에 있을 때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좌일선에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해병 제1연대도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으로 2박2일 간 38도선 이북으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힘들고 어려운, 우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후퇴이동을 했었다. 그때의 해병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던 육군에 대한 원한같은 것으로 인하여 육군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그때 우리는 육군은 장교이건 사병이건 모조리 포로로 취급했었다.
 
그때의 그 감정이 당시의 그 작전에 참전했던 해병들에 의해서 구전되면서 더욱 과장되거나 심화되어 육군에 대한 감정이 세월따라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나는 그때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이었으며 후퇴이동 중은 대대 첨병소대장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해병대 전투(3)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하여 우리가 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고 또한 우수하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육군은 어디까지나 대육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도 모르고 무턱대고 육군을 깔보거나 싫어하는 해병들을 우리는 자주 주변에서 보게 되거나 그런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래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거기에 합당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도 모르고 육군을 무조건 싫어한다는 것은 옳치 않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전의 부득기한 한국전쟁 중의 사실로 받아드리고 이제는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해병정신"
그러나 우리는, 해병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해병정신이 무엇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고 또한 그 속에서, 어려움과 역경 속애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전우애(상경하애의 희생의 정신)를 깨닫고 또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상황처리 방법과 능력을 습득하였던 것이다. 특히 자신에 대하여 알게 되어 "상승해병", "무적해병",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해병정신의 기본기틀을, 정신적, 체력적으로 마련하게 된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그러니 해병정신은 결코 어떤 이론, 우리의 머리 속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그런 이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것은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쉽게 망가지게 된다.
 
"해병정신"은 시련이나 역경을 통한 체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말이나 무슨 문서로도 얻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는 자가 있으면 그런자는 천하의 거짓말쟁이거나 혹은 위선자이거나 또는 모방자일 것이다. 
 
추가적으로 내가 겪었거나 아직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 사고 몇가지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에 제시하고저 한다. 
 
 (2)  열차 속에서의 난동
한국전쟁이 휴전(1953.7.27)된 후(1956년)에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었던 많은 고참 하사관(해병 1, 2기 및 해군 13,14기)들이 전역하고 귀향길에 올라 있을 때의 일이다. 이때 나는 진해에 있는 해병학교의 사관후보생 중대장이었다.  어느 날 교수부장(문희석 중령)을 수행하여 서울행 야간열차인 "통일호"를 탔다. 이때 군 전용열차는 "통일호"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육군 수송관의 해병대 소령이라는 특별 배려로 중령급 이상 장교에게 허용되는 침대칸을 배정받았다.
 
침대칸에서 한참 자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해병대 소령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며 나를 환급히 찾는 다급한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왜 그러시요?"하고 대답했다. 일어나 보니 육군 수송관이었다.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열차 안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육군 사병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젔는데 해병대가 육군을 때려 눕히고 싸움을 말리던 헌병까지 두들겨 패서 열차안이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열차가 못가고 정차해 있으니 소령님 나와서 싸움을 좀 말려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이들이 조용히 돌아갈리가 있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해병대 장교 정모를 쓰고,  물론 장교 약복을 입고 수송관을 따라서 사병칸에 가 보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 광경은 미국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같았다. 담배 연기까지 자욱했고 술병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나는 사병칸에 들어 서자마자 "왜들 자지않고 이렇게 시끄러워!"하고 이들의 기를 꺽기 위하여 우선 소리부터 질렀다. 그때 나는 26세의 나이 였으며 태권도 유단자였다. 순간 조용해젔다. 그리고 뒷쪽에서 "뭐야!"하는 내 목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선채로 그들을 노려봤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 "이 소령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하사관이었다. 이것이 신호나 된 듯 여기 저거서 "이 소령님 웬 일이십니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인사를 듣고도 나는 아무소리 안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사실은 그들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나는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일 누군가 "너는 뭐야!" 했으면 해병대 소령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강성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아마 살인까지 마다했을 지도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한국전쟁 중 소대장, 중대장을 할때의 그 전투정신이 생생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해병대의 명예는 일순간에 땅에 떨어져 버리고 똥이 되었을 것은 분명한 순간 이었다. 그리고 사태는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장교님이다" 하면서 이들은, 해병대 하사관들은 전부 아무 소리 안하고 자기들 자리로 돌아 갔다. 우리가 언제 싸움질 했나? 하는 그런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들은 역전의 용사답게 지난 날에 자기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전투한 그들의 상관을 비록 제대하고 귀향 중에 있었지만 존경하고 있었다. 오늘의 해병들도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이 참다운 가식이 없는 순수한 해병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병정신은 구호나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히 상관을, 또는 남을 위하는 양보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오늘의 해병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다. 
 
 (3)  육군 공수단 사병들과의 싸움
해병들과 육군 공수단 사병들 간의 관계는 마치 견원지간의 사이 같았다. 때문에 부득기 충돌도 종종 피할 수 없이 있었다. 통상 그 시비는 영등포 뻐스 정류장에서 뻐스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소속된 군의 우월성의 자랑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도에 넘치게 되면 싸움으로 번졌다.
 
그날은 육군 공수단 소속 사병이 해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자기들의 김포공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공수단 본대에 보고한 후 보복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김포공항 앞 뻐스정류장에서 해병들이 탄 뻐스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영등포에서 강화행 뻐스가 도착하여 정류장에 정차했는데 그 뻐스 속에서 김포 해병부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앉아있는 해병들을 공수단 사병들이 끌어 내려서 집단으로 두들겨 패버렸다.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은 해병들은 김포의 본대에 돌아가서 이 억울한 사실을 보고하고 소속 지휘관도 모르게 해병대 추럭에 해병들을 싣고 와서 김포공항 앞의 주점거리 일대에서 육군 사병들을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패기시작하여 큰 싸움으로 번져서 그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해병들은 육군 헌병과 육군 공수단 병력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추럭을 타고 김포의 해병부대로 돌아간 큰 사건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걸 보고 해병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썩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좋아했지만 실은 그렇지만 않았다. 해병대는 그때만 해도 너무 단순해서 이런 결과가 육군 수뇌부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4)  국일관에서의 패 싸움
50년대에 해병대내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 장안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종로의 "국일관"(지금은 헐려서 없음)에서 해병대 장교와 육군 장교 간의 싸움은 아주 유명했다.
 
캬바레인 "국일관"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육군 장교의 시비로 치고 박고하는 싸움이 해병대 장교들과 시작되었는데 처음에 이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가 나중에 이 싸움에 합세한 해병대 민용식 소령의 날쎈 발차기 동작을 수반한 싸움 솜씨는 그가 혼자서도 육군 장교들을 모조리 쓰러 뜨리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해병대 장교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춤추러 왔던 민간인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랐었는데 이것이 크게 소문이 퍼져서 서울 장안 일대에 상당기간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육군을 때려 눕힌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여간 좋아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해병대 전투(3)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그때에 왜 그렇게 육군을 미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의 좌측 정면을 맡고있던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그 어려웠던, 평생 잊을 수없는 후퇴이동, 38도선 이북으로부터 2박2일 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 중에 우리가 겪은 고생때문에 아니었는가 나는 생각된다. 이것 역시 사사로운 Happening에 지나지 않지만 육군에게는 그대로 웃어 넘기거나 또는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은 못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때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자랑으로 삼고 있었으나 당한 육군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풍조는, 무엇을 하건 해병대는 육군에게 꼭 이겨야한다는, 심지어 싸움을 하드라도 꼭 이겨야하고 술을 마셔도 이겨야한다는 것같은, 우리의 선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런 억지같은 논리는 지금 생각하면 우리 해병대는 너무나 철이 없었고 또한 순진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5)  군 상호 간의 예의    
해병대가 해체될 당시의 해병대 사령관의 계급은 대장이었으나 기수에 있어서는 육사 9기생과함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해간 1기생을 육사 9기생출신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합참회의에 당시 특검단장인 육사 2기생출신인 육군의 고참 중장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회의 중 해병대 사령관과 특검단장 간에 언쟁이 있었는데 그때의 해병대 사령관의 언행에 대해서 주변에서 이를 목격하고 있던 육군 수뇌부 장성들이 아무리 대장이기로소니 상대가 중장이라 할지라도 기수에 있어서는 새까만 선배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닌가?하고 그들의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육군 장성들의 평이었다는 후문이 전군에 퍼진 일이 있었다.
 
이런 행태는 누가 봐도 좀 지나첬다고 할 것은 당연하지않는가?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 하더라도, 또 군 편제상 부득기하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군의 조직에 있어서도 계급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당연하나 그 보다 앞서는 불문율이 있다. 그것은 계급보다 군에서는 출신 기수의 선, 후배관계를 더욱 중요시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사령관은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고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한국전쟁 때 사령관은 부사령관인 이봉출 장군의 동기생들이 대대장(소령)할 때 대대작전장교(대위)였으니 지난날의 상관이 지금은 자기의 부사령관으로 있으니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이병문 사령관이 거꾸로 된 세계에서 살지 않고 순리대로 된 세계에서 이봉출 장군이 사령관이 되고 다음에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으면 그의 임기 중에 해병대가 해체되었다는 오명은 듣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이봉출 장군의 해병대 사령관 임기 중에 해병대 해체라는 불행하고 또 불법적인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해병대 해체라는 초법적인 처사는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일련의 아쉬움을 나는 아직 갖고 있다.
 
사실 이병문 사령관은 그리 성급히 서둘러 사령관이 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았어도 그의 나이로 봐서 또 해간 1기생 중에는 그때 경쟁자가 없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실은 그보다 앞서 같은 1기생인 1연대장 출신인 김한수 준장은 신임사령관보다 1년 앞서 장군 심사에 통과되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당시의 사령관(김두찬 중장)에 의해 진급이 보류되고 1년 후에 신임 사령관과 함께 별을 달았으나 계급정년이 될 때까지 소장진급은 못하고 전역하고 말았다. 나는 이 점이 신임사령관을 위해 무엇보다 아쉽게 생각된다.
 
무지한 정치인들
이런 것, 군의 서열을 무시하거나 또는 간과하는 것같은 것을 볼때 정치인들은 군의 실정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하거나 또는 무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군의 인사에 직, 간접으로 관여하려했고 또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해병대는 이런 정치인에게 특별히 약했다. 그러니 해병대의 인사정책에 혼선을 종종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인사정책의 무질서는 군의 사기를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근무의욕을 상실케하므로써 군의 발전을 저하시키는 근본 요인이 되게 한다.
 
정치인들은 진급을 청탁했고 보직에도 관여하므로써 해병대의 인사정책에 여러가지로 부작용을 이르키기도 했다. 그들의 이런 관여는 국가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의 어떤 개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청탁에 지나지 않았고 이런 그들의 행태는 해병대의 전력을 내부적으로 잠식하고 있었으나 해병대는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때의 해병대는 內剛外柔가 아니라 外剛內柔였지 않았는가?하고 생각된다.
 
이런 작태는 결국 해병대 사령관을 무력화시켰고 따라서 해병대의 정상운영을 눈에 보이지 않게 방해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려만 그런 행태를 보고 알고 있으면서 이를 그대로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자신이 안타까워서 여기에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 수록 한국의 정치인들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로 인하여 사령관은 내부적으로 많은 원성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만일 이봉출 장군이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으면 해병대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내 정치에 일대 변혁을 이르켰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성품을 가까히서 관찰할 수 있었던 몇몇 장교들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박 정권은 예지하고 이봉출 장군을 마땅히 해병대 사령관으로 임명했어야 하나 임명하지 않고 현직 사령관을 중임시키므로써 그들의 속셈을 위장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측근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정권 유지를 위해서 였을 것으로만 추측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직사령관의 요청에 의한 재벌의 적극적인 후원에 의해서 였는지도 알 수 없다.
 
해병대 사령관 보직 결정이 통치권자에 의해 되지 않고 정치인이나 재벌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그렇게 하여 해병대 사령관이 됐거나 또는 됀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 이상의 비극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상관은 국가가 아니고 정치인이나, 또는 재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태는 국가적으로는 망군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으며 또한 해병대의 입장에서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6)   장군 T/O의 일방적 책정
뿐만 아니라 사령관은 자기와 개인적으로 각별한 친분이 있는 대령을 장군으로 진급시키기 위하여 해병대 편제에도 없는 보급감(T/O상 대령)T/O를 준장으로 격상 개편하여 장군으로 진급시킨 개인 기업체의 장이 기업체를 제멋대로 운용하듯 했으니 이는 누가 봐도 원칙에 입각한 정당한 부대관리, 운용이 아니고 지나친 독선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정당하지 못한 사령관의 독선적인 처사에 대하여 당시 해병대 내부적으로도 불평,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이런 원칙에 벗어난 군 편제의 멋대로의 개편은  박 정권이 그들의 눈 위의 혹같았던 해병대를 국가예산의 절감이라는 허구한 구실로 일방적으로 해체시키는 구실의 일부로도  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해병대에 대한 육군 수뇌부의 불편했던 심기에 또 해병대에 대한 경계의 눈 초리를 늦추지않고 응시하고 있던 집권층에  더욱 가중, 확대되어 해병대 해체의 구실이 되어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집권층에는 이 보다 더 큰 우려사항이 있었을 것으로 그 당시의 정황과 사회상이 보여 주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단순한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해병대출신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나는 아직 확신하고 있다.    
 
2.  박정희 정권의 우려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구테타 초기에 제6군단 병력의 서울 진입이 늦어서 그 황무지 같은 상황 속에 그 자신이 서 있었을 때 해병대의 도움을 요청키 위해 한강을 넘어왔을 때 그곳에 이미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해병대 병력(대대장 오정근 중령 해간 3기)을 보고 감격했을 때의 그 순간을 잊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는 그 감격을 해병대 해체라는 행동으로 역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그 해병대가 지금에 와서 두려움의 존재로 느껴져서 인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해병대의 은혜를 그는 해병대를 엉뚱하게도 국가예산의 절감이라는 허구한 구실로 해체시키는 것으로 갚았다. 그의 측근들은 "한번 혁명을 한 군대는  다시 혁명을 한다"는 말을 믿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뭐가 무서워서 그리고 국가운영을 어떻게 했기에 그들은 그들의 혁명 동지도 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두려워했을까? 
 
그들은 그들의 혁명공약을 어기고 군 본연의 자세에서 너무 멀리 이탈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구테타 초기에 순수했을 그들의 군인정신이 권력의 맛을 보고 그 권력을 놓지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한번 어긴 약속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계속 거짓말을 해야했다. 그러는 가운데 주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어제의 동지도 오늘은 의심의 눈으로 보지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박 정권의 속내  
결국 박 정권은 그들의 정권 붕괴의 위기감으로 인하여, 당시의 혼돈된 사회상을 볼 때 정권교체라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현실적인 피할 수 없는 상황의 발생가능성을 예지하고, 해병대를 갑자기 해체시키기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하므로써 그들을 견제가능한 세력을 제거하고 아울러 국민에게도 자기들의 힘의 건재함을 과시하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 나의 추리가 맞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해병대 사령관의 중임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해병대의 해체를 별도로 발표한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병대 해체와 해병대 사령관의 중임을 동시에 발표하는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이들을 평소에 누가 과연 설득시켜야 했었을까? 그리고 평소의 해병대 수뇌부의 할 일이 무엇인지  나는 묻고 싶다.
 
아쉽고 서글픈 일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때 경호실의 핵심 세력은 해병대출신들이었다. 그런 그들, 정인형(해간 16기) 경호처장. 안재송(해간 24기) 경호과장은 10.26 사건 때 박 대통령과 함께 현장(아래층)에서 그들의 전우인 반선호(해간 16기)중정 총무과장에 의해서 사살됨으로서 박 대통령(2층)과 당일 운명을 같이 했다. 서글픈 일이다.
 
그때 박선호는 아랫층 방에서 해병대 동기생인 정인형 경호처장과 후배인 안재송 경호과장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가 2층에서 총성이 들리자마자 박선호는 권총을 빼어들고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 경호처장과 안 경호과장은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대답대신에 권총을 빼는 순간 이미 권총을 빼서 손에 잡고 있는 박선호에게 3-4m의 지근거리에서 사살되고 말았다.
 
이때 박선호는 안 경호과장에게 먼저 목과 어깨에 각각 1발씩 쏘고 이어서 정 경호처장에게 1발을 쏴서 쓸어틀였다. 안 경호과장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정 경호처장은 출입문가까이까지 기어와서 절명하였다. 생각할 수록 비통한 사건이었다.     
 
특히 안재송은 국가대표 권총선수였고 미국 해병교육단(U.S.M.C.Schools Quantico Va.) 창설 이래의 최고 권총사격 득점자(1964년 현재)로서 그의 100점 만점의 속사권총표적 아래에 "Capt. Ahn, Jae Song  R.O.K. Marine Corps"라고 학교본부내에 있는 Pistol Club의 벽에 크게 벽부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걸 보고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 요원들은 오로지 눈 앞의 이득(정권욕)에만 집착했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그 수단, 방법을 찾기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뭐가 두려웠단 말인가? 그 두려움의 단적인 면을 보여준 것이 유신정권의 출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3.  잠재적 적  
 
그들은 물론 알고 있었겠지만 사실 그들은 우리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그것은 혁명 동지였던 해병대출신들을 반혁명세력으로 규탄하고 그들의 대열에서 축출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이것은 해병대는 그들의 잠재적인 위협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해병대 수뇌부에선 이런 사실을 등한시 했거나 또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편가르기에 눈이 어두워서 사리를 제대로 못보거나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이 무엇보다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다.
 
이런 잠재적인 적에 대하여 해병대의 수뇌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멍청히 안일하게 현재에 안주하고 있다가 그리고 내편이 아니면 적이다 라는 우매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 안주하고 있다가 꼼짝 못하고 당하고 만 것이다. 날벼락을 맞고 쓸어진 것이다. 그러니 생각할 수록 그런 해병대 수뇌부에, 사령관출신들에 대해서 울화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이것은 50여 년 전 한국 전쟁(1952년 여름)이 한참 치열함을 더 해 가고있을 때 해병 제1연대 제3대대가 서부전선(장단지구 전투)에서 "Box Means" 전법으로 중공군을 집단 도살하고 그 전과에만 만족하고 예상되는 적의 역공에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있다가 오히려 그들에게 역공당하고  많은 해병들을 일시에 잃은  뼈 아픈 전례를 다시 되풀이 하고 있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그때 연대작전보좌관으로서 그 비극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바 있다. 그런데 전투사를 만들고 전사연구나 공부는 왜 하는가?   
 
해병대는 그들의 기습에 당하고 아무 소리 못하고 해체라는, 해병대 전통의 와해라는 큰 비운 속에 빠진 것이다. 그러면 그 중단되었던 해병대의 전통을 누가 다시 회복하거나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의 해병대를 말없이 주시하고 있는 노 해병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늘의 해병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과연 해병대의 전통을 올바르게 유지하고 있는지? 지난 날의 뼈 아픈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老兵들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돌연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새로히 들어선 정권은 해병대에 대한 박 정권이 갖고 있던 것 같은 해병대에 대한 정권의 어떤 위기의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박 정권의 해병대 해체가 잘못되었음이 여론을 통하여 부각되었고 따라서 해병대의 재편성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은 80년대의 해병대 사령부의 재설치라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 보다 염려하고 있던 것은 해병대 사령부 재편성에 따르는 숫적 증가가 아니라 해병대 해체에 따른 해병대의 전통의 중단으로 야기되는 무엇 보다 중요한 해병정신의 쇄퇴라는, 다시 회복시키기에는 너무나 불가능에 가까운 사실이다. 오늘의 해병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해병대가 너무 커졌어"라고 말했다. 
그는 어느 석상에서 "해병대가 너무 커졌어"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해병대가 너무 강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해병대가 강해지면 당연히 국가의 통치자로서, 국군의 통수권자로서 기뻐하여야 할 일이겠지만 그에게는 해병대가 부담이 된다는 뜻이 아닌가? 자기의 오늘이 있게 해 준 해병대를 누가 키웠단 말인가?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아닌가? 어떻게 다른 속뜻이 없고서야 대통령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너무 커져서 인제는 자기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닌가? 자신의 정치야망을 실현시키기에는 해병대가 너무 커져서 이제는 걸림돌이라는 뜻으로 밖에 생각안되는 표현이다. 그러면 그는 왜 혁명동지였던 해병대를 경원시하게 되었을까?
 
국가경영을 올바르게 제대로 했으면 자기와의 혁명동지인 해병대가 커지는 것이 기뻐하여야 할 일이지만 그는 반대로 오히려 우려했다. 당연한 것을 우려하는 것은 그 속에 딴 꿍꿍이 속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교묘히 국가예산의 절감이라는, 그것도 얼마되지 않는 허구한 구실로 해병대의 전투력 강화라는, 수적 증가라는 미명하에  해병대 사령부와 그 직활부대를 해체시키므로써 머리(수뇌부)와 다리(지원부대)를 완전히 잘라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교활하고 악랄한 수법인가?
 
머리가 없고 다리가 없는 생물은 시체가 아닌가?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그릇된 야망을 위하여 해병대를 이렇게 죽인 것이다.  그는 해병대 사령부를 해체시키므로써 해병정신과 해병대 전통과 함께 해병대의 정통적인 역사를 말살시킨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머리와 다리를 잘라내는 방법이야 말로 얼마나 잔인한 방법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고도의 정치적 술수가 아니면 술책이라고나 할까?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으로 인하여 눈이 멀어져서 군인으로서의 올바른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것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해병대가 두려운 존재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주변에서 종종 돌고 있던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이봉출 장군이 해병대 사령관이 되면 國是를 '反共'으로 내세우고 한 바탕 하게 되면 정권도 충분이 갈아 치울 수 있을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이런 풍문을 박정희 정권의 핵심세력들이 그들의 정보 조직을 통해 입수 안했을 리가 없었고 또한 거기에 대한 대응책을 안 세웠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임해병대 사령관의 취임일은 7월1일인데 정부에서는 이병문 사령관을 중임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도 그를 중임시킨 것은 그의 정치세력이나 재벌을 끼고 한 중임운동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부에서는 6월 중순 경에 그의 중임을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위장술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중임이 박 정권이 해병대를 해체시키기 위한 예비 단계였음이 해병대의 해체일을 기준할 때 확실해 졌기 때문이다. 
 
그 해 7월 초 박  정권은 10월10일부로 해병대를 국방 예산의 절감을 이유로 해체시킨다고 발표하고 해병대 사령관(이병문 대장)의 퇴임과 동시에 해병대를 해체시켰다.
 
이때 해병대 사령관의 중임기간은 1년으로 되어 있었으나 박 정권은 그를 3개월10일만에 퇴임시켰다. 이것은 애초부터 중임시킬 계획이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심사숙고 해 보면 해병대는 그때  정부의 연막전술에 속아 넘어간 거나 다름이 없다.
 
즉 파월 청룡부대의 초대부대장인 이봉출 장군의 필연적인 해병대 사령관 취임을 저지할 명분도 없고 하여 의도적으로 이병문 사령관을 임시 유임시킨 것으로 나는 생각되었다. 그리고 해병대를 전격 해체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를 7월 초에 공표하고 3개월 후인 1973년 10월10일에 해병대 사령관의 톼임과 함께 해병대를 해체시켰으나 실은 해병대 해체와 동시에 해병대 사령관을 퇴임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은 그들의 궁색한 면을 위장하였다. 그러나 이때 해병대 사령관에게는 8개월이라는 잔여 중임기간이 남아 있었다.
 
결국 그들은 해병대 사령관을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용한 것밖에 안된다. 그렇지 않았으면 당연히 박 정권은 해병대 사령관의 중임 발표와 동시에 해병대 해체도 공표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었던 이유는 해병대의 동요를 의식해서 였는지 알 수없으나 그 수법은 정정당당하지 못한 아주 교활한 수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이병문 사령관의 임기는 지난 6월30일까지 였다. 
 
박 대통령과 정 사령관의 단독면담
이보다 앞서 1971년 여름, 그날은 몹시 더운 날이었는데 정 사령관은 하정복을 입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진해'의 대통령 별장으로 정광호 사령관을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나는 해병대학 총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정 사령관을 수행하여 대통령 별장까지 수행했었다. 이때 별장에서의 박 대통령과 해병대 사령관과의 단독 대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직후 정 사령관의 표정이 몹시 굳어 있었다.
 
그때 정 사령관은 내용의 일부를 말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나밖에 이 일을 할 수 없으니.."하면서 정 사령관에게 이야기한 내용의 일부만을 말했었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몰랐었다. 단지 무슨 중요한 내용이 있었구나하고 짐작만 했을 뿐이었고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후일에 생각해 보니 그 내용이 "해병대 해체"에 관한 내용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때의 정 사령관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후에도 얼마 동안 대화 내용보다 그의 심각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먼 후일에 그의 측근으로부터 들은 내용은 그때 정 사령관은 "해병대 해체"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대통령에게 표했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새삼스러히 생각나는 것은 박 대통령이 말했다는 그 내용"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그 말이다. 그래서 당시 정 사령관의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었던 것을 이해할 만하다. 그로 인하여, "해병대의 해체"라는 박 대통령의 의사에 반대 의사를 표함으로 인하여 정 사령관은 중임을 못하고 6월 말에 퇴임하고 유정회 국회의원이 됐다.
 
만일 그렇다면 후임사령관인 이병문 사령관은 "해병대 해체"에 대한 박 대통령의 계획을 정 사령관으로부터 듣고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알고 있었을 것임에는 틀림 없었을 것이다. 그렇타면 이병문 사령관은 과연 이에 대처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당사자 이외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과거의 잘못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므로서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일을 그대로 덮어두게 되면 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게 된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빤하지 않는가?
 
과거는 잊되 잘못 된 부분은 잊지 말고 개선하기에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전사를 연구하고 또한 역사공부도 하는 것이 아닌가? 
 
지난 일이라 해서 쉬쉬 해 버리는 자는 반드시 그 과거로 인하여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만일 그렇지 않다는 자가 있으면 그런 자야말로 멍청한 자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4.  "해병대 전통"의 와해
 
"해병대의 해체"는 병력감축(지휘부)에서 기인되는 부대의 약화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해병대의 전통을 중단시키는 큰 과오를 범했다는 사실이다. 해병대의 전통은 어떤 서적이나 이론을 통해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이다. 해병대의 전통은 이론이 아니고 그것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정신과 그 전통"은 그 전통을 계승, 유지하고 있는 인물을 통해서만 정확히 전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수 많은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모방하는데 끝일 뿐이다. 그것은 영혼이 없는 육신, 즉 시체나 다름이 없으며 그것은 또한 해병대를 모방한 마네킹(Mannequin)에 불과하다.
 
결국 그는, 박 정권은 해병대의 힘의 중심 역활을 하는 허리의 중간을 짤라버린 거나 다름이 없다. 허리가 짤린 동물은 죽은 시체다. 설사 다시 그 허리를 접합시킨다 해서 과연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어느 바보가 그렇게 생각할까?  이들은 결국 해병대를 다시 온전하게 회복될 수 없는 불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어떡하다 해병대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것은 정권에 의해서 마음대로, 위정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국군 조직법도 자기 멋대로 개정될 수 있다는 단적인 예를 우리에게 보여 준 실례이다. 어떻게 몇몇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이런 엄청난 무리수를 둘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엄청난 일은 미 해병대가 그랳듯이 우리에게도 다시 이런 일이 앞으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특히 해병대의 수뇌부에서는 명심하고 항상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어야한다.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해병대 수뇌부의 몫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그런 망국적인 국가예산의 절약이라는 미명하에 해병대 사령부의 해체를 통한 병력 감축은 막았어야 했고 앞으로도 막아야 한다. 이것은 해병대의 몫이 이며 또한 국민이 하여야 할 일이다. 그것은 해병대의 약화는 국가의 방위력의 약화를 의미하며 해병대는 국가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 우리가 국가 방호에 우리 자신을 희생하며 전투하고 있을 때 "무적 해병대, 귀신잡는 해병대"하며 환호하며 성원하던 그 국민들은 이때 우리 해병대를 방관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투에서 승전할 때마다 대서특필하던 언론조차도 묵묵 아무 소리 없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군대이며 또한 누구를 위하여 싸웠단 말인가? 나는 그런 국민도 원망스럽기도 했다.
 
과연 해병대는 국민을 위한 해병대가 아니었단 말인가? 사실 해병대도 無敵海兵이라고 호언장담만 하고 있지말았어야 했다. 더욱 겸손히 국민을 위한 해병대임을 보여 줬어야 했다. 이런 정책 수행은 지휘부의 몫이이며 또한 책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어디 갈때와 돌아 올때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속담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무슨 사연이건, 또 누구이건!
 
인원수는 쉽게 가감할 수 있지만 두동강이 난 해병대의 전통은 다시 접목시킨다 해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가의 고위 군사정책 기획자들은 알고 있어야 하나 그들은 이를 모르고 있었거나  또는 관심이 없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불안감으로 인하여 해병대를 갑자기 해체시켰을 것으로 밖에 생각이 안된다.
 
"해병대의 전통"은 구전이나 어떤 문서로도 계승되거나 전수될 수 없다.
"해병대의 전통"을 계승할 중간 허리를 국가 예산의 절감이라는 허구한 구실로 무 베듯 싹 잘라버렸으니 아무리 해병대 사령부를 재편성, 설치한들 이미 잘려나간 허리는 원 상태로 회복될 수 없고 또한 잘려진 반토막을 접합시킨들 온전한 해병대의 전통은 회복되거나 또는 계승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같은 아이들의 작난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짜인 위조품(Counterfeit)을 진품인양 내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 모든 해병가족들은 이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Motto에 있는 것 같이 "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Motto를, 미 해병대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은 국민과 정부에 신뢰받는 해병대가 돼지 못 해서 일것이다. 특히 정권에 의해서 두려운 존재로 경계의 대상이 돼 있었다면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병대는 이런 점에 대해서 전혀 무감각했고 무지했었다. 그것은 그때 해병대는 독불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우리 老兵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럴 때 일수록  해병대는 내부적인 단결력과 국가에 대한 봉사정신을 대내외에 과시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우물안의 개구리같이 내편, 네편이나 따지는 근시안적인 행태 속에 있음으로서 정권내부의 이상한 기류의 흐름에 전혀 무감각하였고 또한 무지하였다. 이것이 무엇보다 아쉬운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해병대 수뇌부에 대해서 曰可曰否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해병대 수뇌부는 정권내부에서 흐르고 있던 이상 기류(?)도 감지못하고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령관의 중임이 기쁘고 감사해서 그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계략도 모르고 설마? 하고 있다가 한방 얻어 맞은 것이 아닌가? 그들은, 수뇌부는 과연 사심 없이 사령관을 올바르게 보필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누군가 이에 대하여 대답 좀 해 보라!.
 
그러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과연 해병대 사령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한번 대답 좀 해 보시라! 그것은 해병대내에 잠재하고 있던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활동에 가장 장애요소가 되었던 편가르기, 즉  "내편이 아니면 적이다"라는 유치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해서 였다. 편가르기의 전형적인 사례를 아래의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있다.   
 
5.  공정성이 요구되는 인사정책
 
해병대는 1955년(해사 9기)부터 해사출신 장교의 일정 인원수를 해병대로 전과시켜 해병대 장교로 충원하는 계획을 세워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출신이 다른 장교들은 나름대로의 출신에 대한 우위성을 과시하게 되기 때문에 어느 집단체건 마찰은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이런 장차 예상되는 대립과 마찰에 대해서 그 당시(1955년) 해병대 사령부 참모장(김두찬 준장)에게 해병학교 사관후보생 중대장(당시 소령)을 하면서 해병학교로 의탁교육 온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행태를 관찰한 결과와 미국 해병학교에서의 이들의 언동 등을 보고하고 이의 시정, 대책을 건의 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 참모장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고만 있었다. 아마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였을 것으로 나는 그의 웃음을 보면서 느꼈고 동시에 그의 표정을 통하여 별수 없구나 하고 실망했다.  
 
이런 중요한 인사정책의 변화는 당시 해병대 수뇌부의 결정이었는데 그들은 그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있었다. 그것은 해병학교출신과 해군 사관학교출신 간의 비율의 적당한 조정과 운영이었는데 해병대 수뇌부에서는 근시안적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어서 군에서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진급과 보직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노골화된 차등을 보이므로써 해병학교출신 장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으며 그 골이 점차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편파적인 인사정책의 결과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수뇌부에서 과연 알고도 모른척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아주 중요한 사항을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화합과 단결이었다. 그 결과가 해병학교출신과 해군 사관학교출신 간의 편가르기식 분열현상으로 표면화된 것이었다.   
 
결국 이런 분열현상은 해병대 수뇌부의 편파적인 인사정책의 산물이었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좀 더 큰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 그것이 해병대의 단결을 내부적으로, 점진적으로 와해시키고 있었음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다.
 
해병대 수뇌부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고있었는지 또는 알고도 모른척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편파적인 인사정책이 해병대 해체 시까지 계속 됬었다. 
추측컨데 지금은 그들이 키운 나무의 뿌리가 더 커젔는지 또는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해병대의 정신과 전통을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편파적인 인사 정책은 중지되어야 한다.     
 
그들은 국가에 충성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들의 심복, 자기들의 편이 되어 줄것을 원했다. 이런 흐름은  해병정신의 쇠퇴와 해병대 전통의 순수성과 단결력을 잠식하는 독소적 역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많은 장교들이 이런 굴욕적인 편 가르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 하면 그 선상에 있지 않으면 눈에 보이게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 하여 도미유학장교 선발도 기준이 전혀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영어만 잘 하면 무조건 합격이고 한 술 더 떠서 우수한 장교로 아예 각인을 찍었었다. 어떻게 영어를 잘하면 우수하다고 어디에다 기준을 두고 그렇게 정평할 수 있는지? 우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병대의 당시의 수뇌부에서, 또 담당참모들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고방식이 건실하고 국가관이 확립되어 있고 투철한 보병장교가 영어가 부족하면 일정기간 어학교육을 시켜서 해당과정으로 유학가게 할 생각은 못했을까? 이것이 무엇보다 생각할 수록 아쉬웠던 부분이다.
 
그뿐 아니다. 보병장교의 과정도 특과장교라도 영어만 잘하면, 심지어 통신장교도 선발했었다. 그 장교는 해당과정에서 야외실습 때 독도법을 몰라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그 현장에서 그것을 보았다.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보병소대장, 중대장을 한 장교가 가야 할 과정에도 영어를 잘하면 된다하여 통역장교들을 우선적으로 여러명을 보냈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 없는 인사행정인가? 그들이, 소대장, 중대당도 안한 그들이 과연 미국 군사학교에서 보병장교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었다고 누가 생각할까? 또한 해당 군사학교에서 통역장교출신 유학장교들을 보고 한국 해병대 보병장교의 자질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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