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 search

2010.03.23 15:25

귀국

(*.32.142.224) 조회 수 9729 추천 수 3 댓글 0






||0||0★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오시는 어느 해병대 선배님의 수기중 귀국부분입니다.

배가 다낭항을 출발하고 몇 시간 후부터 다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 멀미는 작년 월남에 올 때 보다도 더 심했다. 일년이 넘는 월남 생활에 심신이 많이 망가졌나보다....그래도 우리는 좋았다. 마냥 행복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그랬으리라... 그런 와중에서도 **이의 생각은 늘 머리 속 한편에 남아 있었다.
지금 **이와 같이 가는 거라면....
며칠 후 갑자기 바깥 공기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살을 에이는 찬 바람이었다. 아~! 지금이 12월,한국에서는 지금 추운 겨울인 것을 잊고 있었다.
너무 추워 갑판에 나가 있을 수가 없었다.

1971년 12월 09일 드디어 배가 부산항에 들어섰다. 높은 갑판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항 제 3부두는 어마어마한 인파로 가득했고 한편에는 환영행사장으로 보이는 곳이 요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의 인기 연예인들은 다 동원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월한국군중 처음으로 철수해 오는 부대이니 당연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철수해 오는 부대들은 이런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뒤늦게 월남에 갈 때 그러했듯이...

행사장에 참석할 병력이 내려가고 우리는 배에 남아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배의 바로 아래 부둣가에 수많은 가족들이 나와 각종 피켓에 이름을 써서 들고 다녔고 또, 풍선에 이름을 써서 긴 실에 매어 갑판까지 올려 보내기도 하였다.
나는 선실로 내려가 잠시 후 내릴 준비와 월남서부터 갖고 온 PRC-25 무전기를 챙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 들어와, 야! ***, 네 이름이 씌여진 풍선이 올라왔어! 했다. 갑판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나 이런~! 장내 정리 헌병들이 사람들을 배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때 어떤 동기 하나가 내 이름이 씌여진 풍선이 있어 내려다보았는데 부모님 같더라, 그래서 너 이배에 있다고 악을 쓰고 손짓으로 알려 드렸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중에 들은 부모님 말씀이 그때 군인들이 밀어 내면서 모두 포항으로 갈 거니까 면회를 하려면 포항으로 가라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그냥 서울로 돌아 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풍선을 띄웠을 때 갑판위에서 누군가가 내가 배에 있다고 손짓으로 알려 주어서 일단 안심하셨다고 하셨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모든 병력이 배에서 내려 부두에 집결했다. 지시 받은대로 무척이나 정들었던 무전기를 나를 찾아 온 보안요원에게 넘겨주었다. 그 무전기는 그 당시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최신형 무전기여서 특별 취급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6.25 때 쓰던 낡은 미제 무전기인 PRC-8, -9, -10 을 사용하고 있었다.

포항으로 가는 길은 작년에 월남으로 갈 때의 역순이었다. 기차로 포항역까지, 다시 트럭으로 포항 사단까지 가서 배치받은 병사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서 일주일간 대기 후 전원 보름간의 휴가를 가게 된다고 했다. 아~ 드디어 이제는 그동안 여러번 속아왔던 휴가를 정말 가게 되었구나, 설마 이번에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우리는 갑자기 당하는 추운 기후에 적응하며 하는 일 없이 일주일이 가기만 기다렸다. 이틀이 지나자 입술이 트고 갈라지고 부어서 밥을 먹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저마다 그리던 고향을 찾아갈 기대에 마음이 한 껏 부풀어 있었다. 그 일주일 대기하는 동안에도 월남에서 포악했던 3소대장은 각종 트집을 잡아 쫄병들 패기에 정신이 없었다.

출발 전날 부대배치 발표가 있었다. 9365xxx 상병 ***, 교육기지~! 내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근무할 곳은 진해였다.
해병들은 진해 신병훈련소를 수료하고 떠날 때 "다시는 이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을 농담 삼아 흔히 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인가? 월남으로 가기전에 행사부대에 뽑혀 훈련소로 들어 온적이 있었는데 이젠 또 아예 근무를 진해에서 하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딜 가든지 군대생활은 비슷할 테니까...

다음날 드디어 입대후 첫 휴가를 출발하였다. 서울 쪽으로 갈 몇 명, 그러니까 월남에서 귀국박스를 같이 사용한 동료들끼리 생전 처음으로 고속버스로 경부고속로를 달려 보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고속버스에 예쁜 안내양이 있었고 신문도 나누어 주고 사탕도 주고, 안내 방송도 했었다. 또 지금의 비행기 여행처럼 스위치만 눌러 안내양이 오면 물 한컵을 시키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또 그레이하운드라는 회사의 고속버스는 차안에 화장실도 있었다.

우리들은 서울역 뒤에 있는 서부역으로 가서 월남에서 부쳤던 귀국박스를 찾아 뚜껑을 열고 각자의 물건을 꺼내 갖은 후 다음날 동작동 국립묘지 **이의 묘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동작동 국립묘지....
다음날 나는 **이가 있을 동작동 국립묘지로 갔다. 안내소에서 위치와 묘비번호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월남 전사자 묘역으로 수없이 많은 월남 전사자의 묘비가 있었다. 드디어 해병상병 김**의 묘 라고 새겨진 **이의 묘비를 보는 순간 가슴이 찡~ 하고 아려 왔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분노도 치밀었다.

곧 이어 월남 전우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함께 **이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우리는 매년 현충일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 약속은 제대 후 두 번 정도 지켜 지는 듯 하더니 그 후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 혼자만 삼십년이 넘도록 매년 **이의 가족이 다녀간 흔적을 보아 왔을 뿐이다. 태진이의 가족이 다녀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매번 나라에서 기본으로 해주는 꽃이 아닌 아름다운 꽃이 듬뿍 꽃혀있기 때문이다.

나는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걸러 본 일이 없이 매년 현충일이면 **이를 찾는다. 나에게는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하늘이 **이에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제대하기 전에도 그 때 특별 포상휴가를 받아서 **이한테 갈 수 있었으니까.... 처음 몇 년간은 묘비앞에 메모를 써 놓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ㅠ.ㅠ
그러던 중 삼십년이 지난 11월 26일(2000.11.26) 정말 극적으로 월남전우 230기 ***를 재회했다. 그래서 지난 현충일에는 신**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서 **이 한테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오리지날 진로 소주(두꺼비)를 푸짐히 따라 주었다. **이가 매우 반가워 했을 것이다....!

  1. 상륙훈련중인 해병대원들의 모습

  2. 싴군의 마린룩 - IBS 기초훈련

  3. 한국전쟁시 해병대주요전투

  4. 월남전쟁시 해병대주요전투

  5. 한국해병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6. 해병대 신병 제1기 2중대 3소대

  7. 해병대에 연이은 구타사고

  8. 최초의 여군해병과 장부현씨가 두른 태극기

  9. 해병대 특수수색대의 위장

  10. "우리는 담배 잡는 해병대" 해병대 1사단 금연운동 확산

  11. 해병 1111기 716명 배출…'미래 해병 양성 원년' 선언

  12. 작업복 앞주머니에 붙였던 앵카와 구형철모

  13. 어머니에 장기이식한 두 해병 '훈훈한 효행'

  14. 1983년 월성침투 무장간첩섬멸 관련자료

  15. 귀국

  16. 516과 해병대, 516과 해병2여단

  17. 해병대해체의 교훈

  18. 1973년 국군의 날 행사의 불행한 사고

  19. 해병대사령부 재창설비화 - 해병대의 전통과 비화中

  20. 김인식감독의 해병대, 김흥국 - 내 인생의 스승 해병대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 27 Next
/ 27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