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시 해병대주요전투

by 관리자 posted Mar 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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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 지구 전투(’51. 6. 2∼6. 20)

국군과 유엔군이 1951년 5월 춘계 공세를 격퇴한 직후‚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 남서쪽에 있는 전략 요충지 도솔산(▲1‚148)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1단계 작전(1951. 6. 4 ∼ 6. 12)시 공격 목표 ∼1’에서 목표 ‘16’까지 점령한 뒤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고‚ 제2단계 작전(1951. 6. 13 ∼ 6. 24)시 공격 목표 ‘17’에서 목표 ‘24’까지 점령하고 버지선까지 진출하여‚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에 배치된 북괴군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의 정예부대를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 끝에 격퇴하고 도솔산을 탈환함으로써 ‘무적 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전투이다.
1951. 6 .4 도솔산 탈환에 실패한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임무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암석지대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중화기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주간 공격을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돌격작전을 감행하는 등 난공불락의 진지를 혈전 17일 동안 피와 땀으로 얼룩진 끈질긴 공격 끝에 24개 목표를 점령하였다.
6. 20 드디어 빛나는 개가를 올림으로써 적 2개 사단을 격퇴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우군 전선의 활로를 개척할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이 도솔산을 방문하여 ‘무적 해병대’라 칭하면서‚ ‘무적 해병’ 휘호를 하사하였고‚ 1951. 8. 19 제1연대에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였다.


 

김일성 고지(펀치볼) 지구 전투(’51. 8. 30∼9. 3)

휴전회담이 제기된 직후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 북쪽 해안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3주간 피의 대공방전을 감행하였다. 제1단계 작전(’51. 8. 21~9. 1)시 현 을지전망대와 가전리 일대(▲924-▲1‚026-▲702-▲660)에 배치된 북괴군 제3군단 제1사단을 치열한 혈전 끝에 격퇴하고 펀치볼을 확보하였으며‚ 제2단계 작전(’51. 9. 1~9. 20)시 간무봉 일대의 적 은거지를 제압하여‚ 내금강산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지형을 장악하였고‚ 좌측방의 한국 육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점령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국 해병대의 김일성 고지(▲924) 및 모택동(▲1026) 전투는 펀치볼 작전의 제1단계 작전으로 펀치볼 북쪽 능선 일대에 천문학적 숫자의 지뢰가 매설된 장애를 극복하고‚ 4일 동안 924고지와 1026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 끝에 이들을 탈환함으로써‚ 펀치볼을 조기 확보하게 되었고‚ 한국 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크게 과시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 격찬하였다.


 

서울탈환작전(’50. 9. 20∼9. 28)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미 제10군단은 1950. 9. 18 서울로 진격하여 11일 동안 작전을 전개한 끝에‚ 서울 외곽 지역과 시가지에서 북괴군 4개 사단(제9사단‚ 제18사단‚ 제25여단‚ 독립 제78연대)을 격퇴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는 선봉부대로 서울 서측방에서 수도 중심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는 서울 남측방과 동측방에서 우회‚ 포위 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한국 해병대는 9. 20 한강을 도하‚ 수색방향으로 진격한 뒤 최후 방어선인 104고지와 연희고지군 일대의 적을 격퇴하여 수도탈환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시가지 전투를 전개하여 잔적을 격멸하고‚ 9. 27 06:10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90일 동안 적의 점령 아래 있던 서울을 탈환하고 9. 29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통영상륙작전(’50. 8. 17∼9. 22)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괴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 8. 17일 18:00. 7척의 해군 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매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 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격멸하고‚ 통영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탈취 확보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적 대대를 격퇴함으로써 낙동강 교두보선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였고‚ 유엔군 철수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을 수행하여 ‘귀신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52. 3. 17∼’53. 7. 27)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최될 당시‚ 피아간 더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초 진지 쟁탈전이 계속되자‚ 수도 서울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의 일환으로 1952. 3. 17.부터 중·동부에서 서부전선 장단 지구로 투입된 해병대 제1연대는‚ 1953년 휴전 시 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판문점에서 사천강에 이르는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 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진지에서 중공군 2개 사단(제194‚제195사단)과 대결한 방어 전투이다.
해병대 제1전투단을 이 전투에서 사천강을 경계선으로 중공군 2개 사단과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여 군사 분계선을 아군에 유리하게 확정짓도록 하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문산 축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기여함으로써‚ 대통령 부대 표창과 신익희 민의원 의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양도 작전(1951.8.28 ∼ 1953.7.27 )

해병대 독립 제43중대가 1951년 8월 28일 함경북도 명천 전방 해상의 양도에 상륙하여 해안 봉쇄선을 연장하고 적의
후방을 위협하는 동시에 첩보수집 및 유엔군 해군활동을 보장하는 전략도서 확보작전을 수행하였다. 1952년 2월 20일 야간‚ 적 제63연대 1개 대대가 양도에 상륙하여 아 해병대를 공격하였을 때 해병대 독립 제43중대가 적을 유인하면서 화력과 육박전 그리고 연합해군 구축함의 지원사격으로 적 대대를 격멸시킨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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