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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관학교 90기 김종훈선배님의 글입니다.

237기 동기생들을 뒤에 두고 나를 포함한 하교 90기 하후생은 신병훈련소 서쪽의 천막 막사인 하후생 중대로 이동하여 28주의 하교 훈련과정에 돌입하였다.

당시 훈련소 정문 앞의 빨간 벽돌 건물의 하사관학교로 바로 입교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 신병 기수와 같이 매달 하후생 병력이 충원되어 하교 건물에 다 수용을 못해 4주 정도를 이곳에 머물다 하교건물에 입교를 하게 되었다.
하교 80기부터 시작된 단기하사 제도는 96기까지 매달 임관되어 실무에 배치되었으나,
그 후로는 하사관자원이 부족하여 5, 6개월을 주기로 충원된 것으로 기억된다

하교에 입교하여 우리의 훈련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이 기간 중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하교교육, 훈련이 해병하사관으로서의 자긍심과 실무배치 후 분대장으로서의 지휘 통솔력배양 등 정신력과 전술 교리의 이론과 실제를 아주 강하고 조화 있게 실시하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해병하사관 훈련이 북한의 특수부대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정규 교육훈련 과정이었고 해병하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이 육군에서도 도입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하사관 훈련에서 매일 반복되고 제일 중요시 한 것이 구보이었다.
처음에는 비무장으로 훈련소 영내를 조금씩 달리다가 모래주머니를 두 다리에 달고 달릴 때는 정말로 힘에 겨웠으나, 지속되는 구보훈련에서 우리의 다리는 무쇠같이 단련되어 무장구보 시에도 낙오 없이 훈련을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매일 석별과업은 구보였으며 처음에는 훈련소 영내를 순회하다 나중에는 덕산 사격장을 지나 진해화학을 왕복하는 영외 구보로 발전되어 매일 평균 10km는 달렸으니 하교 훈련기간 동안 우리가 달린 연 거리는 서울, 부산을 왕복하고도 넘는 거리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해병하사의 기본 체력과 강인함의 상징이었다.

71년 7월말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90기 하후생 중대는 상남 훈련대로 이동을 하였다.
해병이면 모두다 울고 넘는 눈물고개에서 시작된 상남 훈련대 까지 구보이동은 우리모두를 울리고 말았다.  
여기서 눈물고개 즉, 행정구역으로 진해와 창원경계선인 안민고개는 현재 안민터널이 수년 전에 개통되어 내가 2년 전 창원에서 진해로 갈 때 터널 밑에서 먼발치로 구경만 했을 뿐이다.

상남 훈련대에는 90기하후생 중대, 해간47기 초등 군사반, 해양대와 수산대의 초급장교 훈련반,
병 239기가 같이 훈련을 받고있었다.
당시 해양대, 수산대 장교 훈련반과 90기 하후생과의 충돌이 있었다.
그들 장교반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졸업과 동시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선상생활 의무복무를 하는 장교요원으로 상남 훈련을 받고 있었다.

사건은 공동 수도장에서 발단이 되었다. 그 당시 창원훈련대의 물 사정은 최악이었다.
식수도 부족하고 샤워는 일주 내지 이주에 한번정도이고 세탁은 아예 엄두도 못내 일요일에 “용지 못”에서 외출 세탁을 실시하였다.
저녁식사 후 우리와 조우한 그들 일부가 수돗물을 이용 중인 우리에게 양보를 요구하였다.
이에 우리가 응하지 않자 그들이 장교후보생의 권위를 내세워 다시 요구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시작되어 집단 대치과정으로 확대되어 창원훈련대가 시끌벅적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지휘계통에 보고되어 그 날 저녁 우리는 밤잠을 자지 못하고 날밤을 새워야 했다.  5파운드의 위력을 실감한 것이 그날이 처음 이었으며 삼복더위에 동 내의 겨울 복장의 완전무장 연병장 선착순에 밤이 가는 줄을 몰랐다.
엄연한 해군 장교반에 대한 일종의 하극상으로 90기 하후생 중대가 단체기압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날사건은 우리의 일방적 게임으로 그들의 자긍심, 체면에 큰 데미지를 주었다.
중대장과 구대장은 별로 우리를 나무라지 않았지만, 사건이 훈련대 지휘라인에 보고되어 야간 비상훈련이 하달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 우리는 상남훈련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애증이 교차되는 90기 하후생 중대로 알려지었다

잠깐 위에서 언급한 “용지 못” 이야기를 해보자. 용이 승천한 곳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용지 못은 당시 우리들의 세탁소이고 목욕탕이었다.
무더운 상남 훈련 중 영내의 물 사정이 최악이었던 당시 매주 일요일이면 하배낭에 세탁물을 채워와 "세탁개시!!!"하면 빠른 동작으로 대충 세탁을 하고  구대장의 동태를 살피고 잠시 보이지 않으면 그대로 용지 못에 뛰어들어 더위를 식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용지 못 목욕은 안전사고를 대비하여 엄금사항으로 적발되어 오리걸음으로 귀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상남 훈련대에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해병하사관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중대 전술인 공격, 방어훈련, 야간 전투훈련, 각종 공용화기인 M-79유탄 발사기, AR자동소총, LMG, 81m/m, 106m/m, 화염방사기 등 모든 화기의 사격훈련과, 공수훈련, 유격훈련을 창원, 진영, 마산일원을 휘 젖고 다니며 훈련을 받았다.

나의 직업과 관련하여 요즘도 창원공단 출장을 자주 가는데 지금은 그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거대한 공장, 아파트 숲, 고층건물로 변해버려 잃어버린 추억의 현장을 머리 속에서 재생할 수 밖에 없다.
오직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용지 못이다.
지금의 용지 못은 창원 시민의 최고의 휴식공원으로 변해 있다.
우리가 훈련을 받을 때보다 더욱 크게 조성되고 위락시설을 갖추어 아침저녁으로 창원시민들의 최고휴식처이며 그 북쪽에 해병대 훈련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경남 창원시 용호동 시민공원과 아파트 촌으로 변한 상남훈련대의 지금모습과 기념탑>

1999년 초여름 업무출장 시 어느 날 저녁 “용지 못”을 찾아 예전의 모습을 그려보았으나, 그 옛날의 모습은 어느 곳 하나 없고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그곳에서 유일하게 나를 반겨주는 것이 하나가 있었으니 그 것이 바로 상남훈련대 기념탑이었다.

어두운 밤에 조명 빛을 받고 우뚝 서 있는 기념탑을 본 순간 나는 엄숙한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올렸다. 이곳이 무적해병, 귀신 잡는 해병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훈련대자리임을 설명하는 기념탑의 비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리 높여 읽어 내리고 나니 가슴이 뭉클하고 진한 감동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에도 그곳에 가면 꼭 해병대훈련대 기념탑을 찾아보고 경례를 올렸다

이 기념탑은 산업화되어 거대한 도시로 변해버린 상남일원이 해병대훈련대가 위치하여 정의와 자유를 신념으로 하는 무적해병, 귀신 잡는 해병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지역임을 후세에 길이 전하려 세웠는데, 당시 해병대 사령부, 각 지역 해병 전우회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고 기념비문에서 밝히고 있으며, 이러한 후원에 참여하신 각 지역 전우회에 경의를 드립니다.

<경남 창원시 용호동 시민공원내의 상남훈련대 기념탑>

창원에서의 훈련기간은 8주정도로 기억된다.
이중, 제일 힘든 과정이 공수훈련의 1주간이었다. 제일 더운 혹서기에 훈련을 받다보니 몸이 녹초가 되고 피골이 상접이라는 말과 같이 그때의 사진을 보면 얼굴이 내가 아니다.
이때 우리를 도운 것이 오수시간 이었다. 점심식사 후 1시간의 취침은 그야말로 구세주이며 오아시스였다. 지금도 혹 서기 훈련에 오수 시간이 있는지 궁금하다.

창원 훈련연대의 생활 중 제일 기억나는 것 하나가 그때 즉, 71년8월 초순경 청룡부대의 월남 파병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일이다.
당시 월남 파병에서 가장 많이 희생을 당한 것이 우리의 청룡부대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창원훈련대의 모든 훈련 해병들은 소리높이 환성을 지르고 기뻐하였다.

<상남훈련대 공수교육대에서 공수교육중 잠시 휴식, 뒤로 막타워가 보인다.>

공수 훈련이 끝나고 우리는 마지막 훈련인 유격훈련을 위하여 마산 벽암지로 이동을 하였다
창원훈련대를 출발한 우리는 지금의 창원대로 옆인 개울을 오른쪽에 끼고 벽암지로 향했다.
지금도 창원대로는 전국에서 제일 긴 일직선도로로 약 12KM에 달하는 머나먼 길이다.
당시 도보로 이동중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지루한 길이였는지 가도가도 제자리인 것 같았다

대열이 봉암교에 이르러 휴식시간을 가지었다.
지금도 봉암교 밑에 음식점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시 이곳에는 아구찜이 유명하였었다.
우리 조병우 구대장은 아구찜 요리를 선호하였는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구요리를 자랑하였다

마산벽암지의 훈련은 상남훈련의 마지막과정으로 16주차 교육이었으며 유격훈련이 끝나고 진해 하교에 귀대하면 하사 임관까지 우리가 목 메이게 기대하던 매주 일요일 외출이 실시되는 것이었다.
90기 하후생 우리는 희망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유격훈련을 실시하였다.

벽암지에서의 일화는 모든 대원이 그렇게도 야간 동초근무를 싫어했으나 이곳에서는 서로가 동초 근무를 희망하였다.
그것은 벽암지의 지형이 울타리도 없다보니 초입에 있는 근무초소가 마을과 인접하여 야간 특별 먹거리가 풍부하여 음료는 물론 소주, 막걸리를 숨겨 마시고 즐기는 기회가 발생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적발되어 또다시 산악구보로 그 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유격훈련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외줄 타기 였으며 나머지 훈련과정은 대체로 무난했고 오히려 절벽 하강 훈련(암벽레펠) 등은 흥미로웠다.
이때 집에서 편지가 배달되어 앞에서 이야기한 큰 고모님의 서거소식을 듣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

1주간의 마산 벽암지 유격훈련을 끝내고 진해로 출발하였다.
지금도 있는지 마진터널을 통과한 대열은 마치 개선장병의 기분으로 하교에 복귀하여 나머지 4주간의 교육훈련에 돌입하였다. 물론 일요일 첫 외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외출 일요일이 되었다.
당시 하교90기는 부산, 경남, 경북지역의 동기들이 상당히 많아 이들은 집에 가게되어 더욱 신이 났으며, 나와 같이 서울 등 타 지역출신은 마산시내에서 하루를 즐겼다.
마산의 오동동의 인근 극장과 음식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당시 충무공 이순신 영화를 감상한 기억이 있고, 극장에서 만난 마산시내 여고생들과 제과점에서 데이트를 한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외출시간은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갔다.
귀대시간이 닦아오면 제일 먼저 걱정되는 것이 음주측정 검사통과이다.
귀대하면 당직 구대장이 개개인으로 음주 측정을 실시하는데 요즈음처럼 음주측정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대장 코를 향하여 크게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이러한 음주측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갖은 수단이 동원되고 그 비법이 하교 선임들로부터 전수되었는데, 요즈음 음주운전 단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도 그 때 우리가 사용한 방법들이 이용되는 것들이 있다.

제일 초보적인 것이 양치질, 껌 씹기부터 솔 잎 씹기, 은단 씹기, 박하사탕 빨기. 물 마시기,목욕탕 한증 등 모든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서로 알려주고 시행하였는데 그래도 노련한 세파트 같은 구대장 코를 속이기는 그리 쉽지가 않았다.  
지금처럼 기준 혈중알콜 농도가 얼마인지도 없이 여하튼 구대장을 속이기 위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어 우리는 벌써 31년 전부터 음주단속을 피하기 위한 훈련에 단련되어 왔다.

음주측정 검사에서 일정 수가 넘으면 그날 저녁은 순검을 시작으로 다음날 총 기상 시간까지 편히 잠을 자지 못했으니 이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술을 안 마시면 간단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젊은 혈기와 훈련으로부터의 해방감은 마산, 진해의 주막 앞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후반기 4주의 하교교육은 주로 강의와 평가시간이 많아 육체적으로 조금 수월하였다.
대신 분대장으로서의 지휘 통솔능력, 작전계획수립방법 등 많은 군사지식을 배양하였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작전명령 5단계인데 ① 상황 ② 임무 ③ 실시 ④ 행정 및 군수 ⑤ 지휘 및 통신은 지금도 나의 직업분야인 기업경영 컨설팅과 경영전략에도 응용되는 군사지식이다

매주 일요일 외출이 그 동안 힘든 훈련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이 유일한 낙이었던 후반기 하교 훈련이 거의 끝나가면서 우리는 이제 병과 결정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제일 기피 병과는 역시 보병이었다.
보병으로 결정되면 다시 또 눈물고개를 너머 창원훈련대에서 8주간의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0기 전원은 중대장, 선임 하사관과의 병과 상담을 실시하여 각기 병과가 결정되었고 나는 통신병과로 인근의 덕산 통신 교육대에서 8주간의 통신교육에 돌입하였다.

덕산 통신교육대

덕산 통신교육대의 교육, 훈련은 지금까지의 하교 기본교육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거의 모든 시간이 실내강의로 진행되었고 나는 기재반장의 직책으로 내무생활 보다는 통신 기자재 관리업무가 주임무이었다.  
이 때 우리의 구대장은 별명이 살살이로 불린 이명수 중사, 선임 하사관은 이익관 상사, 그리고 진해고 출신으로 별명이 진드기인 김진득 하사들이 교관으로 우리를 교육시켰다.

통신교육대의 분위기는 명랑하고 화기애애하였다. 그것은 구대장인 이명수 중사가 별명과 같이 전체 분위기를 조성하고 일요일이면 집으로 우리를 부르고 진해만 바닷가에서 같이 낚시와 조개를 잡아 막걸리 한 사발을 같이하며 우리를 동생같이 사랑으로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분도 전역하여 사회생활을 할 텐데 연락할 방도가 없다.  
그분을 알고있는 선후배 전우들이  계시면 연락을 바랍니다


  이때 우리의 학생장은 백준기 하후생으로 그는 현재   KBS 중견 탈렌트로 활약 중이이며, 요즈음도
  브라운관에서 종종 볼 수가 있다.
  수 년 전까지 서로 통화하고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요즈음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그가 더욱 인기 있는  
  탤런트로 뜨기를 바라고 이 기회를 통하여   우리 해병 전우들의 탤런트 백준기에 대한 사랑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통신 교육대에서 우리는 25명 정도가 무선 하후반 교육을   받았는데 도중에 신병 241기 통신병과 병력이 입교하여   우리와 같이 교육을 받고 실무에 배치되었다.
  이들 중 나의 국민학교 1년 선배인 유영상 해병이 입교하여   동기보다 많은 나이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저녁이면 그를 기재실 작업요원으로 선발하여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 후 사단 앵그리코 중대에서 근무하는 그와 또 다른 국민학교 1년 선배로 11연대에서 근무하던 228기 이영순 해병을 3연대 근무 시 종종 재회를 하였다.
통신 교육대에서의 교육은 전기재료이론, 차량용 무선통신장비인 GRC-19, 기갑, 포병,
보병에서 사용하는 AN/PRC-8, 9. 10등의 무선장비와 유선수리, 나무전주대 오르기 훈련, 개나리 음어 교육 등이 기억난다.

그중 재미있는 과정이 나무전주대 오르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먹던 기본 실력이 있어 전주대 오르기 시범은 내 몫이었다.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너무 빨리 시범을 보이다가 내려올 때 나무전주의 날카로운 결에 손바닥을 찔려 고생한 적도 있었다. 이때 병들과 같이 교육을 받을 때 우리가 조교역을 맡아 교육생을 전주대에 올려 관등성명과 노래를 시켜 담력을 길렀던 기억이 난다.    

이 기간에 90기 동기 중 상남 훈련대에서 훈련 중이던 보병동기와는 일요일이면 재회하고,진해훈련소 영내에도 같이 들어가 힘들었던 그곳의 기억을 상기하고 후임기수들을 위로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그해 71년 가을을 덕산에서 지나는 동안 8주의 시간이 지나 하사 임관식을 갖게 되었다. 임관은 통신, 보병하사 동시에 있었는데 훈련소 영내에서 교육기지 사령관 임석 하에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28주의 힘들고 긴 여정을 끝내고 자랑스러운 해병하사로 임관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특별휴가 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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