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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해병대 특별경호(소)대(99부대)의 창설

1) 창설 배경

1974년 박정희대통령 시해 미수사건(육영수여사 저격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나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취임하면서 경호실 기능이 강화된다. 공수단 출신의 차지철 실장은, 제2의 청와대라 불리던 진해 공관과 73년 대통령 공식 별장으로 지정된 청해대의 경비 및 호위를 담당할 대통령 특별경호부대를 특전사 대원으로 창설하여 배치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에 해군참모총장은 난색을 표명하며 해군의 수중파괴대나 해병의 특수수색대를 거론하였고, 결국 대통령 특별경호부대를 해병부대에서 창설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해병 수뇌부에서는 사령부 해체 이후 해병 위상 제고와 관련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국군의 날 행사 병력에서 차출하여 부대를 창설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2) 부대원 선발 과정

1974년 9월 초순, 포항 사단의 모든 부대에서 차출된 250여 명의 대원들과 김포 여단에서 차출된 150여 명의 해병들이 여의도 광장에서 합류하여 국군의 날 행사에 참가할 해병행사부대가 결성되었다. 해병대 사령부 해체 후 처음 참가하는 국군의 날 행사인 만큼, 짜빈동 전투의 영웅 신원배 대위 등 엘리트 해병 장교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행사 연습이 한참 진행되던 어느 날, 해군 본부에서 나온 해군 제독(소장)과 해병 장군(준장)이 영관장교들을 거느리고 행사부대 앞에 나타났다. 장교와 장기하사관 및 병장들을 열외 시킨 후, 해병 장군은 직접 행사부대원들 중 일부 대원들을 선발하였다. 그들이 돌아간 후, 영문을 모르는 행사대원들 사이에서 첩보부대(MIU)원 차출이라는 루머가 퍼져나갔다.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치고 자대에 복귀한 행사 대원들이 15일 간의 특별 휴가를 떠날 때, 행사 훈련 시 차출되었던 대원들은 휴가 명령 대신 전출 명령을 받게 된다. 포항 사단과 김포 여단에서 전출 명령을 받은 대원 80여명은 진해경비대에 집결하여 3일 간 대기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소대장(대위-포항)과 선임하사(중사-김포)는 곧바로 80여 명의 대원들 중에서 특별경호(소)대원 선발 작업을 하였다. 청와대 경호실의 신원 조회를 통과한 자를 대상으로 자체 선발하였다. 이렇게 장교 1명, 하사관 5명, 그리고 30여 명의 병으로 구성된 해병특별경호(소)대가 창설된다. 특별경호소대원들은 곧바로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수색교육대에 입교하기 위해 포항으로 출발한다.

2. 해병특별경호(소)대원의 훈련

1) 공수 - 기습특공 - 유격 기본교육과정

해병특별경호(소)대는 특수교육을 수료한 자 중에서 대원들을 선발하여 부대를 창설한 것이 아니라, 부대를 먼저 창설한 후에 부대원 전원을 포항 사단 특수교육대에 위탁 교육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는 특별경호(소)대원들을 특수수색교육과정을 이수하도록 계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에 1-2회 실시하는 수색교육 일정이 이미 마무리가 된 상태에서, 특수수색중대와는 임무가 다른 특별경호(소)대원 교육에 수색교육이 과연 적합한 훈련 과정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결국 공수 - 기습특공 - 유격 기본교육과정을 종합 이수시키는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나의 앨범 속의 휘장패용증을 보니 소속은 제1해병사단으로 되어 있었고, 공수휘장패용증 번호는 제814호, 기습특공휘장패용증 번호는 제1776호, 유격휘장패용증 번호는 제1491호로 되어 있다.

2) 공수교육 차수에 얽힌 일화

우리 부대원들이 공수교육대에 입교했을 때, 해병공수 9차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동용 사단장도 9차 교육생으로 공수교육대장(나호원 대위)의 특별교육을 받고 있었다. 9차보다 1주 후에 교육을 시작한 우리 대원들은 특차로 불리었고, 훈련 복장도 우리는 전통적인 해병대 위장복을 입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작업복 차림의 9차 교육생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교관은 해병공수교육 1차-3차 교육 당시 교관을 담당했던 특수수색대 중사로 우리 부대원들의 훈련을 담당하기 위해 특별히 배치되었다. 그 당시는 김해 공군기지에서 지원된 수송기(C-123)로 자격강하를 하였는데, 우리 부대원들의 교육 일정에 맞춰 자격 강하 계획이 수정되었기 때문에, 사단장이 포함된 9차 교육생들은 자격강하를 위해 1주를 더 기다려야만 했었다. 공수교육 특차 수료식 때, 사단장과 4명의 연대장이 우리 부대원들의 가슴에 직접 공수윙을 달아주었다.

공수교육대를 떠나는데, 하후생 111기(보병)들이 공수교육대에 입교하러 오고 있었는데, 이들이 해병 하사관 교육기간 중 4주의 공수기본교육을 수료하게 되는 첫 번째 기수이다. 공수교육대에서는 9차와 자격강하를 같이 한 특차 특별경호(소)대원들 때문에, 이들의 교육 차수를 몇차로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이들을 공수 11차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자연히 우리 특별경호(소)대원들은 해병공수 10차가 되었다. 공수교육 수료 후에야 차수가 정해진 특별한 경우였다.

3. 해병특별경호(소)대원 복장

1) 근무 복장

공수, 기습특공, 유격 기본교육과정과 종합 훈련을 마치고 우리 부대원들에게 그린베레모가 지급되었다. 해병대의 전통적인 그린베레모로 모표는 빨간 바탕에 해병대 보병 마크였다. 그 당시 그린베레모를 쓸 수 있는 부대는 포항 사단 특수수색중대 뿐이었다. 우천시를 제외하고 늘 베레모를 쓰고 근무를 하다 보니 베레모는 햇볕에 누렇게 변색되어갔다. 내가 특별경호(소)대에 근무한 21개월 동안 부대 훈련 기간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곤 하루도 빠짐없이 착용하던 그린베레모는 점점 누렇게 변해가면서 멋을 과시했었고, 내가 착용하던 그 베레모를 내 후임들이 계속해서 썼을 것이다.

여름 근무복은 베트남전 당시 해병들이 입던 전통적인 해병대 위장복이었고, 74년 국군의 날 행사시 처음 선보인 넓은무늬 위장복은 76년 6월까지는 지급되지 않았었다. 비가 올 때는 위장복 위에 장교용 우의를 입었고, 베레모 대신 위장커버를 씌운 철모를 썼다. 봄과 가을의 근무복은 그린사지였고, 겨울에는 그린사지 위에 털모자가 달려있는 계급장 없는 근무복을 입었다. 털모자는 베레모를 쓴 대원들의 뒷퉁수를 찬바람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군화는 졸병 때는 전통적인 해병대 쎄모화를 신었지만 장마철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기에 고참병이 되면서 대부분 미제 군화나 정글화를 구입해서 신었다.

대원들에게는 M1 소총 대신 베트남전에서 사용하던 M16 자동소총이 지급되었고, 하사관 이상은 근무시 권총을 차고 근무를 하였다. M16 자동소총은 총구가 원형인 신형과 삼지창 형태의 구형이 있었다. 총구가 다 닳아서 명중률은 낮았지만, 개머리판이 고무로 되어 있어서 제식훈련을 할 때는 좋았다. 의장대의 훈련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던 우리 부대원들은, 경호제식훈련이라는 우리 부대만의 제식훈련을 만든다고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75년 여름 행사시 M16 자동소총은 국산으로 대체되었는데, 명중률은 높았지만 개머리판이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어서 쉽게 부서졌다. 제식훈련 연습하면서 개머리판을 수 없이 부쉈던 기억이 난다.

2) 휘장 패용

부대 창설 초기에는 모든 근무복의 상의 좌측 주머니 위에 유격 휘장(녹색)과 공수 휘장을 패용했고, 우측 주머니 위치에 붉은 박쥐가 새겨진 원형의 기습특공(AMPH RAID) 휘장을 패용하였으며, 우측 주머니 위에 명찰과 그 위에 철제 공수 윙을 부착하였다. 75년도 봄 행사 후 포항으로부터 새로 바뀐 기습특공 휘장(검은 박쥐 모양의 직사각형 휘장)이 도착하였고, 75년 여름 행사시에는 검은 박쥐 모양의 직사각형 휘장을 우측 주머니 위에 패용하였다. 붉은 박쥐가 새겨진 원형 휘장을 뗀 것은 75년 겨울 쯤 이었던 것 같다.

우측의 원형 기습특공 휘장을 떼고 난 후, 부대원들 사이에서 부대 마크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던 것 같다. 선임하사와 선임병들을 중심으로 부대 마크에 대한 많은 도안들이 모아졌다. 그러나 그 작업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상어(사단특수수색중대), 돌고래(해군수중파괴대), 해골(사단수색교육대), 박쥐(김포수색대대) 등 이미 다른 부대에서 사용하는 상징물을 피하면서도 부대의 특성을 강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해병특별경호대’에서 해병대의 경호부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해병대 앵커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독수리만 경호를 상징하는 비상하는 독수리로 바꾼 디자인이 제시되기도 했었다. 또한 ‘특별경호대’를 영어로 표기하면 ‘Special Guard Team’ 쯤 될 텐데, 휘장에 ‘Special Guard’라고 새겨 넣으면, 의장대의 ‘Hornor Guard'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래서 특별 부대임을 강조하기 위해 ‘Special Force’를 넣기로 하였던 것 같다. ‘Special Force’의 ‘Force’는 ‘Force Recon’과도 관련이 있고, 특히 우리 부대의 공식 명칭인 ‘특별경호(소)대’를 그 당시에는 줄여서 ‘특경대’라고 하지 않고 ‘특별소대’ 또는 ‘특소’라고 불렀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던것 같다. 그리고 아래에 ‘해병특별경호대’라고 한글로 새겨 넣었던 것으로 기억이나며. 마크제작사에 의뢰하여 샘플로 휘장을 제작했지만 공식 휘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76년 봄 행사 때 까지는 패용하지 않았다.

4. 해병특별경호(소)대 운용

우리 부대는 통제부사령관 - 경비대장(해병 대령) - 특별경호소대장의 지휘계통으로 편제되었다. 따라서 우리 소대장은 계급이 소령이면서도 직책이 소대장이었기 때문에 직속상관 관등성명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운용은 청와대 경호실장 - 통제부사령부 참모장(해군 준장) - 해병특별경호대장의 지휘계통으로 이루어졌다. 진해 공관은 진해지역 내에 있다. 거제군에 속했던 저도도 75년에 진해시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대통령 공식 별장과 진해 공관은 모두 진해지역 군부대 관할지역 내에 위치하게 된다. 군부대 내에서의 대통령 경호를 위해서는 청와대 경호실과 군부대 사령부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진해지역의 군부대의 사령관은 통제부사령관이다. 그래서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헌병대, 경비대와는 달리 경호실팀과 같이 내곽 위병 및 호위를 담당하는 특별경호대는 통제부사령관을 대신한 참모장이 경호실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지시를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름 행사시에는 경호실의 직접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

해병특별경호대는 무인도 수색 정찰 또는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부대가 아니었다. 해군 수중파괴대의 수중 수색과 진해 경비대원 혹은 QRF 나온 사단 해병들의 주변 섬에 대한 수색 정찰이 끝나면, 귀빈이 오시기 하루 전에 우리 특별경호부대원들이 행사장에 들어가고 귀빈이 가신 직후 우리 부대는 철수했다. 75년 여름 행사 당시 우리 특별경호대원은 진해공관 근무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팀이 모두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 때 기관총 M60을 처음 구경하였다. 우리 대원들은 휴대 무기 외에 워키토키를 지급받았고, 수시로 약식 암호를 사용하여 본부와의 연락을 취했다. 대통령의 막사 방문, 밀짚 모자에 반바지 차림의 경호실장과 경호원들 그리고 가족들과 접할 기회도 있었다. 어느 날 밤 2시 경 군견 2마리를 끌고 순찰 나온 경호원과 같이 근무 교대하러 가던 중 어른 키 만한 길이의 능사를 발견하고 개머리판으로 눌러서 잡았던 기억, 장거리 자동 전화를 몰랐던 그 시절 경호원의 배려로 고향 집에 통화를 하는 선임병을 보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해병특별경호대는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행사시 행사장 외곽의 경비를 담당하는 부대가 아니었다. 대통령이 진해 공관에 머무르는 동안, 진해지역통합당직실에서 모든 출입자를 통제 관리하고, 공관 초소의 우리 대원과 연락을 취하는데 공관 초소는 우리 대원과 경호원이 합동 근무를 한다. 통행이 제한되면 우리 부대원과 경호실 요원 외에는 거리에 아무도 없다. 헌병들은 외곽 근무를 서고, 해병대원들은 산 속에 매복 또는 외곽을 경비한다. 졸업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통령 및 경호원 - 국방부장관 - 합참의장 - 육군참모총장 - 해군참모총장 - 공군참모총장 - 주한유엔군사령관 등 4성 장군들의 차량 행렬, 그리고 한참 후에 삼성 장군들의 차량 행렬이 정문을 통과해 해군사관학교로 이동하면 우리부대와 관련된 행사는 끝났다.

즉 우리 부대는 대통령이 진해 공관과 청해대에 머무를 때 호위와 경비를 담당하는 특별경호부대였다. 우리 부대는 팀제로 운영되었다. 1팀은 병 6명에 하사 1명으로 구성되었고, 팀장을 오장이라고 불렀다. 평상시에는 진해지역통합당직실에는 2개팀이, 진해공관에는 1개 팀이 배정되었다. 나는 1년 간 진해지역통합당직실 근무를 하였다. 통합당직실 근무를 헌병대에 인계하고 본대가 OOO 기지로 옮겼을 때, 나는 진해공관 책임자로 남게 되었다. 76년 봄 행사시 다시 우리부대원은 헌병들로부터 진해지역통합당직실을 인계받아 행사를 치뤘고, 행사 이후 헌병들에게 다시 인계하였다.

특별경호(소)대 운영상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특별경호대원들의 병력 보충 문제였다. 76년 4월 행사 때 나는 최고 고참병이었다. 선임 병들의 전역으로 우리 부대원들은 30여 명에서 20여 명으로 줄어있었다. 창설 당시 소대장 한소령님은 육군대학에 입학하였고, 포항 사단에서 새로운 소대장(대위)이 부임하였다. 새로운 소대장을 모시고 4월 행사를 마쳤다. 행사 직후, 포항 사단으로부터 보충 병력이 전입되었다. 공수교육을 기본으로 특수교육을 1가지 이상 수료한 자 중에서 무도 실력, 신장 등을 고려하여 2차 대원 선발 작업에 들어갔다. 그 당시 우리 부대 창설멤버 중 가장 후임병이 270기였다. 새로 선발된 대원들은 271기부터 278기까지로 인원은 대략 15-6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들에 대한 자체 교육이 실시되었지만, 부대 창설 당시와 같은 교육훈련의 필요성과 그 방법이 숙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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