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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3 15:25

귀국

조회 수 9237 댓글 0






||0||0★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오시는 어느 해병대 선배님의 수기중 귀국부분입니다.

배가 다낭항을 출발하고 몇 시간 후부터 다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 멀미는 작년 월남에 올 때 보다도 더 심했다. 일년이 넘는 월남 생활에 심신이 많이 망가졌나보다....그래도 우리는 좋았다. 마냥 행복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그랬으리라... 그런 와중에서도 **이의 생각은 늘 머리 속 한편에 남아 있었다.
지금 **이와 같이 가는 거라면....
며칠 후 갑자기 바깥 공기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살을 에이는 찬 바람이었다. 아~! 지금이 12월,한국에서는 지금 추운 겨울인 것을 잊고 있었다.
너무 추워 갑판에 나가 있을 수가 없었다.

1971년 12월 09일 드디어 배가 부산항에 들어섰다. 높은 갑판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항 제 3부두는 어마어마한 인파로 가득했고 한편에는 환영행사장으로 보이는 곳이 요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의 인기 연예인들은 다 동원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월한국군중 처음으로 철수해 오는 부대이니 당연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철수해 오는 부대들은 이런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뒤늦게 월남에 갈 때 그러했듯이...

행사장에 참석할 병력이 내려가고 우리는 배에 남아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배의 바로 아래 부둣가에 수많은 가족들이 나와 각종 피켓에 이름을 써서 들고 다녔고 또, 풍선에 이름을 써서 긴 실에 매어 갑판까지 올려 보내기도 하였다.
나는 선실로 내려가 잠시 후 내릴 준비와 월남서부터 갖고 온 PRC-25 무전기를 챙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 들어와, 야! ***, 네 이름이 씌여진 풍선이 올라왔어! 했다. 갑판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나 이런~! 장내 정리 헌병들이 사람들을 배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때 어떤 동기 하나가 내 이름이 씌여진 풍선이 있어 내려다보았는데 부모님 같더라, 그래서 너 이배에 있다고 악을 쓰고 손짓으로 알려 드렸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중에 들은 부모님 말씀이 그때 군인들이 밀어 내면서 모두 포항으로 갈 거니까 면회를 하려면 포항으로 가라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그냥 서울로 돌아 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풍선을 띄웠을 때 갑판위에서 누군가가 내가 배에 있다고 손짓으로 알려 주어서 일단 안심하셨다고 하셨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모든 병력이 배에서 내려 부두에 집결했다. 지시 받은대로 무척이나 정들었던 무전기를 나를 찾아 온 보안요원에게 넘겨주었다. 그 무전기는 그 당시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최신형 무전기여서 특별 취급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6.25 때 쓰던 낡은 미제 무전기인 PRC-8, -9, -10 을 사용하고 있었다.

포항으로 가는 길은 작년에 월남으로 갈 때의 역순이었다. 기차로 포항역까지, 다시 트럭으로 포항 사단까지 가서 배치받은 병사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서 일주일간 대기 후 전원 보름간의 휴가를 가게 된다고 했다. 아~ 드디어 이제는 그동안 여러번 속아왔던 휴가를 정말 가게 되었구나, 설마 이번에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우리는 갑자기 당하는 추운 기후에 적응하며 하는 일 없이 일주일이 가기만 기다렸다. 이틀이 지나자 입술이 트고 갈라지고 부어서 밥을 먹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저마다 그리던 고향을 찾아갈 기대에 마음이 한 껏 부풀어 있었다. 그 일주일 대기하는 동안에도 월남에서 포악했던 3소대장은 각종 트집을 잡아 쫄병들 패기에 정신이 없었다.

출발 전날 부대배치 발표가 있었다. 9365xxx 상병 ***, 교육기지~! 내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근무할 곳은 진해였다.
해병들은 진해 신병훈련소를 수료하고 떠날 때 "다시는 이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을 농담 삼아 흔히 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인가? 월남으로 가기전에 행사부대에 뽑혀 훈련소로 들어 온적이 있었는데 이젠 또 아예 근무를 진해에서 하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딜 가든지 군대생활은 비슷할 테니까...

다음날 드디어 입대후 첫 휴가를 출발하였다. 서울 쪽으로 갈 몇 명, 그러니까 월남에서 귀국박스를 같이 사용한 동료들끼리 생전 처음으로 고속버스로 경부고속로를 달려 보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고속버스에 예쁜 안내양이 있었고 신문도 나누어 주고 사탕도 주고, 안내 방송도 했었다. 또 지금의 비행기 여행처럼 스위치만 눌러 안내양이 오면 물 한컵을 시키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또 그레이하운드라는 회사의 고속버스는 차안에 화장실도 있었다.

우리들은 서울역 뒤에 있는 서부역으로 가서 월남에서 부쳤던 귀국박스를 찾아 뚜껑을 열고 각자의 물건을 꺼내 갖은 후 다음날 동작동 국립묘지 **이의 묘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동작동 국립묘지....
다음날 나는 **이가 있을 동작동 국립묘지로 갔다. 안내소에서 위치와 묘비번호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월남 전사자 묘역으로 수없이 많은 월남 전사자의 묘비가 있었다. 드디어 해병상병 김**의 묘 라고 새겨진 **이의 묘비를 보는 순간 가슴이 찡~ 하고 아려 왔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분노도 치밀었다.

곧 이어 월남 전우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함께 **이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우리는 매년 현충일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 약속은 제대 후 두 번 정도 지켜 지는 듯 하더니 그 후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 혼자만 삼십년이 넘도록 매년 **이의 가족이 다녀간 흔적을 보아 왔을 뿐이다. 태진이의 가족이 다녀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매번 나라에서 기본으로 해주는 꽃이 아닌 아름다운 꽃이 듬뿍 꽃혀있기 때문이다.

나는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걸러 본 일이 없이 매년 현충일이면 **이를 찾는다. 나에게는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하늘이 **이에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제대하기 전에도 그 때 특별 포상휴가를 받아서 **이한테 갈 수 있었으니까.... 처음 몇 년간은 묘비앞에 메모를 써 놓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ㅠ.ㅠ
그러던 중 삼십년이 지난 11월 26일(2000.11.26) 정말 극적으로 월남전우 230기 ***를 재회했다. 그래서 지난 현충일에는 신**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서 **이 한테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오리지날 진로 소주(두꺼비)를 푸짐히 따라 주었다. **이가 매우 반가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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