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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병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이선호:(예) 해병대 대령, 전국방대 교수, 행정학 박사

                                                             blog.chosun.com/lsh09

 

 

1. 어제의 해병대

 

가. 해병대 창설배경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창설되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과 여 · 순 반란사건의 전훈에 따라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그 뒤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초대 사령관 신현준 중령 휘하 380명은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모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 한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1949년 8월 1일, 장교와 하사관을 해군에서 증원 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특모하여‚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증편하였다. 해병대 창설의 역사적 배경을 이하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 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4연대내에 침투 조직되어 있던 김지회(중위), 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노당 프락치들에 의해 주도된 반란, 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지역에서 군, 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래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은 해방 후의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해병대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그 당시 광주지국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폭동진압작전을 전개한 끝에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22일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했던 해군진압부대 (임시함대)는 제반 여건과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해상으로 도주하는 소수의 반란군을 분쇄했을 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손원일 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에서는 그 작전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다음과 같은 가정적인 판단 즉,"만약에 우리  해군에 육전대나 해병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가정적인 판단과 그러한 판단에 따라 제시된 일부 지휘관 및 참모들의 건설적이고 애군적인 의견과 건의가 그러한 특수부대를 갖는 것이 삼면환해의 조국강토를 지켜 나갈 우리 해군의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식되고, 또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그 필요성이 절감됨에 따라 마침내 그 창군기의 해군수뇌부에서는 결코 용이할 리 만무한 시대적인 여건을 무릅쓰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그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끈덕지게 박차를 가한 끝에  드디어 그 어려운 해병대 창설이란 대역사를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해병대의 창설을 뒷받침한 법령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1949년 5월 5일에 공포된 대통령령 제88호였다. 그런데,[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제1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육상전투에 임하는 동시에 주둔지역의 경비임무를 수행한다] (제2조) 라고 되어 있던 그 1,2조 중 해병대의 임무를 규정한 제2조는 6.25전쟁 중인 1952년 8월 16일에 개정 공포된 대통령령 제672호에 의거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의하여 일반 육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로 재규정됨으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전투부대임을 명문화시켰다. 

 

나. 한국전쟁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해병대

(1) 진동리작전과 통영상륙작전으로 “무적, 귀신잡는 해병”되다.

 

 낙동강 최후 방어선의 서측방인 마산 서남방의 관문 지대를 형성하는 이른바 3전(진전, 진북, 진동면)지구 가운데 마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동지구에 위기가 고조된 시기는 낙동강 공방전이 가열되기 시작한 1950년 8월상순경이었다. 이 지역으로 침공했던 적은 마산과 진해를 공략하기 위해 호남지구를 석권한 다음 진주와 사천 및 고성지구로 기동한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는 북괴군 제6사단이었다. 그리고 이와 대결할 아군 부대는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육군 제25사단과 긴급 배속된 미육군 제24사단의 1개 연대와 미해병대 제5연대(제1여단), 그리고 제주도에서 공비토벌임무룰 마치고 이동해 온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해병대의 김성은 부대(연대 규모)와 육군의 민기식부대 및 최천 경무관이 지휘하는 경찰부대 등이었다.

이 특수임무부대의 전투는 진주를 탈환하고자 낙동강 방어선의 서측방에서 최초로 감행된 공격작전이었는데, 진주 탈한에는 성공 못했지만, 적 정예부대인 제6사단에 4천5백명 이상의 병력 손실을 가하고 기동장비 대다수가 파괴되는 큰 성과를 얻어 사실상 전투능력을 상실키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부산으로 진격하려는 적의 예봉을 일단 좌절시켰다.

1950년 7월 23일부터 8월 13일까지의 20일간 계속된 진동리 일대의 작전에서 미육군 25사단에 배속된 김성은부대(증강된 대대급)는 기간 중 킨 특수임무부대의 후방 보급로를 방호하는 임무를 띠고서 지역내의 주요 지형지물을 선점한 적과 혈투를 버렸다. 8월 1일 새벽, 고사리 지구에서 북괴군 제6사단의 기동정찰부대를 요격하여 대승을 거둔데 이어 계속하여, 8월 6일 야반과 수리봉 (557고지) 서북산(739고지) 등 진동리 서북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를 사력을 다해 공격 점령했으며, 8월 12일 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기동하여 패퇴한 적이 집결해 있는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여 잔적을 소탕하는 등 공격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인민군 제6사단의 주력을 반신불수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해병대의 감투정신을 빛내내 성취한 이 공로가 미육군의 추천에 따라 한국 전쟁 중 처음으로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진주가 적 수중에 덜어가고 진주에서 마산과 진해에 이르는 통로가 차단된 상황하에서 한 때 진동리에 투입된 김성은부대가 전멸했다는 오보가 나올 정도로 격전의 연속이었다.

  그 동안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던 통영읍에 약 1개대대의 적 병력이 침입하자, 해군본부에서는 바로 그 무렵 낙동강 방어전선(진동리 작전 등)에서 일시 철수하여 영천지구로 투입키 위해 일시 진해에 집결 대기해있던 해병대 김성은 부대장에게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에서 거제도를 진출 할 것으로 예상되는 적 진출로를 차단 격퇴시키라는 명령이 내렸다. 통영을 침공 점령한 적은 북괴군 제7사단의 일부 병력이었다. 통영과 거제도는 지척간이고, 거제도가 점령되면 임시수도 부산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거제도 상륙명령에 따라 2척의 LST에 병력을 분승시켜 그날 밤 10시경 진해 군항을 출항 이동 간, 김성은 부대장은 그 이튿날 새벽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지도 동쪽 기슭에 이르자, 그 동안 자신이 새워놓은 작전복안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이 때 해군 함선까지도 김성은부대장(당시 대령)이 직접 지휘하도록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

 먼저 2개조의 해상 정찰대를 투입하여 통영시가지 쪽과 거제도 서해안 쪽의 적정을 탐지한 다음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작전명령의 변경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불과 기백명의 적은 병력으로 넓은 거제도에 상륙하여 긴 서방 해안선을 수비하는 소극적이고 불안한 대책보다는 차라리 당시 통영 해상을 초계중에 있던 P.C-703호 (함장 이성호 중령)를 비롯한 수 척의 우리 해군함정의 지원 하에 통영읍 동북단의 장평리에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의 기발한 작전개념은 부대가 이튿날 새벽에 기습 상륙하여 통영 시가지를 감제하는 망일봉(▲148)을 선제 점령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통영읍의 진입 길목인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퇴로와 적 후속부대의 진입을 차단해 놓고서 총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통영에 진입한 적을 독 안에 든 쥐처럼 포위 섬멸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전계획을 끈질기게 해군 당국에 요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작명의 변경을 승인받게 된 것이다.

김성은 부대장은 P.C-703호와 소해정 504, 901 ,320, 307호 등 해군함정의 지원 하에 해상 이동을 감행하되,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적을 기만하기 위해 그 일대에 함포사격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망해봉 방향 해안으로 기습적인 야간 상륙을 감행한 것이다. 계획대로 그 이튿날 새벽에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선제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기만당한 적이 한발 늦게 망해봉 감제고지로 기어 올라오는 바, 사전 준비된 진지에서 100여명의 적을 일거에 요격하여 승기를 잡게 되었다. 그날 오후 해군통제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증원병력을 지원받고, 그 다음날 (19일) 미명을 기해 총 지상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드디어 괴뢰군 제7사단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통영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한국군 최초의 미군의 지원을 안 받은 단독 상륙작전의 성공 사례였다.

 

  진동리 작전의 여세를 몰아 사기충천한 해병대에 의해 감행된 성공적인 통영 상륙작전은 적의 거제도 공략과 부산 진출 기도를 조기에 좌절 차단시킴으로서 전술적 전략적 가치를 십분 발휘한 것이었다. 이 사실이 미군 측에 알려지자, 외국 언론이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내었소."라고 대사 특필하게 되었다. 이 찬사는 전광석화와도 같은 그 작전의 묘수에 경탄을 금치 못한 외신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1950년 8월 17일, 뉴욬 헤럴드 트리뷴지 등 외신 기자들은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 "귀신 잡는 해병대"와 “무적 해병대의 상징” 이라는 찬사를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의 애칭인 귀신 잡는 해병이란 말의 유래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TONG-YENG" Area Landing Operation, widely known to the world as a symbol of invincible Marine Corps“.

 

적 사살 274명, 포로 147명, 각종 구경화기 노획 200여정의 전과를 수립함으로서 임민군 제7사단을 와채시키는 대승의 통영상륙작전은 이겅르호 끝나지 않고 그 후 인천상륙자전이 개시된 9월 15일 이후까지도 주야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성은부대는 많은 피를 흘렸다. 한편 해병대의 여타 주력부대는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2) 인천상륙작전, 수도탈환작전으로 한국전쟁의 하일라이트를 장식하다.

 

 1950. 9. 15 유엔군 제7합동기동부대에 의해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총 7만여명의 병력과 261척(미국 225, 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네덜란드 1, 한국 15)의 함정이 참가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적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 수세에서 공세로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과 15척의 함정, 해병대 3개대대 및 육군 제 17연대가 참가하였다(그러나 실제로 육군은 D일의 적전 상륙에 참가하지 않고 D+3일의 행정상륙에 참가한 다음 수도 탈환작전에 동참하였음).

 미해병대 제1사단에 작전배속되어 D일 오후 만조시에 인천에 상륙한 한국해병연대는 미해병대가 해안교두보 확보 작전을 하는 동안 인천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한 다음, 일사천리로 미해병대와 함께 김포비행장을 점령 한 다음, 한강을 도하하여 경인가도를 거쳐 적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 외곽 방어선인 104고지와 연희고지를 치열한 교전 끝에탈환하였다. 계속하여 우리 해병대는 사기충천하여 9월 25일엔 북아현동, 영천동, 마포방면을 통하여 서울 시가로 일제히 진출하였다. 동월 26일 오후에는 제2대대가 시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계속 전진하여 27일 오전 6시경 중앙청 돔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감격을 누렸다. 그리하여 이어서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그 익일인 9월 29일 중앙청 중앙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등이 참석한 역사적인 환도식(還都式)을 거행하도록 뒷받침한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해병대는 신속히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지역 내 잔적을 소탕한 다음, 익일부터 공격기세를 늦추지 않고 동북방으로 진출해 김포비행장을 탈취하고 수도 서울로 진격해 나갔다. 그리하여 19일에는 주력이 영등포 서쪽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일부는 행주 나루터를 확보한 다음 야간 강습도하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 1주일째인 9월 21일 오후 맥아더는 안양 서쪽에서 작전 중인 미해병1사단을 방문, 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가죽점퍼 속에서 은성훈장을 꺼내어 그의 가슴에 달아주면서 "빠른 시일 안에 서울에서 만나자"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숙소인 주일 미대사관에서 오랜만에 부인과 1박하는 동안 부산으로 전화를 걸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까운 장래에 각하를 서울로 모시도록 서둘러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기쁨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 9월 22일 미8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개시하여 대치하고 있던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시작했는데, 25일까지는 상륙군인 미10군단과 서울 남쪽 오산에서 합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철상(slash)'과 망치(hammer)작전'으로서 한반도의 적을 인천 상륙작전으로 양단 격파함으로써 북진하는 유엔군이 이를 포위·섬멸한다는 작전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때 미해병제1사단 제1연대는 영등포로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서남으로 진입하고, 미해병대 제15연대와 한국해병대 1대대는 일산, 수색 쪽으로 접근하였고, 뒤 늦게 도착하여 인천에 대기 중인 미해병대 제7연대는 북한산 경유 미아리 쪽에서 남으로 압박함으로써 서울을 9월 25일까지 점령할 계획을 했다. 그러나 서측으로 접근한 미해병대는 당인리, 와우산, 인왕산을 연하는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공격이 돈좌됨으로써 23일까지도 서울 서대문을 돌파하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2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공격 기세를 회복한 한·미 해병대는 연희고지를 탈취하고 서대문으로 진격 중 9월 25일 아침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당일 저녁에 겨우 서대문 형무소를 점령했을 때, 간발의 차이로 수용되어 있던 미군 포로 4백여명을 북한군이 도주하면서 대동 월북한 후였다.

 익일 9시를 기해 미해병대 제1사단장이 서울 중심가로의 진격명령을 내리자, 작전구역별로 시가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배속된 한국해병대 제2대대는 새벽부터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서울 탈환은 누구보다도 한국군이 선두에서 성취해야한다는 열망을 미해병대 지휘관이 묵인해 준 것이다. 미해병대 복장을 한 한국해병대 장병이 서울역으로 진격하는 동안 공산치하에서 3개월간 신음하던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호하였다. 서울역 청사 안에는 북한군 일부가 남아 완강히 저항 하였으나, 해병대원이 화염방사기로 전원을 소사시켰다.    이날 오후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는 '서울이 다시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다'는 성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내는 그 당시 시가전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완전탈환은 못한 상태였다.

 박정모 소위(대령 예편, 현재 생존)가 이끈 한국 해병대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는 서울시청을 점령하고 시청사 안에 걸려 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박살내었다. 그리고 시청 옥상에 휘날리던 인공기를 내려 불태우고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이때 인근의 각국 대사관 옥상에는 여전히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9월 26일이 저물어갈 무렵, 한·미 해병대가 확보한 서울시가지는 겨우 절반도 안 되었으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호텔에 본부를 둔 한국 해병대 제2대대는 대대장 김종기 소령이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불러놓고 다음날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기자가 "중앙청은 미해병대 제5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분부가 있었으며, 상금 3천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뜸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정모 소위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허가를 상신하였다. 대대장은 신현준 연대장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미해병대의 양해를 득한 후) 박소위를 격려하였다.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호텔 보이를 시켜 구해놓은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 중앙처으로 접근하였다. 세종로 일대에는 군데군데 북한군이 구축해 놓은 사낭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소탕, 제압한 다음, 2개 분대를 중앙 돔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를 근접호위케 하여 2m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2등병조를 대동하고 돔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 사다리는 폭격으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하였다. 부득이 호위 분대원들의 허리띠를 모두 회수하여 연결한 다음 천정에 매달고서 천신만고 끝에 돔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때가 9월 27일 새벽 6시 10분이었다.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내건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양병수 이등병은 이 공로로 미동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상금 3천만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태평양 전쟁시 최대의 격전지 유황도 상륙작전에서 4인의 해병이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인 아링톤 국립묘지에 있는 전쟁기념비는 미해병대의 상징이다. 서울 탈환에 앞장 선 미해병대는 곳곳에 성조기를 꽂고 승리를 기념하였으나, 국권의 상징인 중앙청만은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올리도록 아량을 배품으로써 형제 해병대의 혈맹관계를 확인하였다. 9월 28일 한·미 해병대는 서울의 잔적을 완전 소탕하게 되었으며, 익일 거행될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하는 서울 수복기념식 준비를 하는 사이에, '수도 완전 탈환'이라는 제하의 대형활자 신문호외가 이날 오후에 전국에 배포되었다.

 예년처럼 1996년 9월 28일에도 중앙청에는 태극기를 게양하는 기념행사를 해병대 주관으로 가진 바 있다. 문민정부가 일제의 총독부를 철거함에 따라 이것이 이곳 마지막 행사가 될 것이기에 격전지에 세워진 104고지 전적비 추념식과 함께 당시 도하작전을 상기하는 해병대 철인3종 경기가 양화동 한강 시민공원에서 펼쳐져 해이된 국민안보의식 고취에 일조하였음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우리는 인구 1천만이 넘는 거대도시 서울에 살면서 한국전쟁기간 중 주인이 4번씩이나 바뀌는 동안 초토화된 바 있으나 이제 세계유수의 빌딩숲을 이루게 된 것을 경탄하기도 하지만, 한국 전쟁 60주년을 맞는 현재까지도 수도탈환 기념비조차 세우지 않은 안보불감증 환자들로 된 역대 정권 실세들의 왜곡된 정치행태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천 자유공원에 우뚝 서 있는 맥아더 동상을 허물려는 악의 세력 주동자가 한 대학교수란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다. 베트남 전쟁에서 신화를 남긴 청룡부대, 전세계에 명성 떨치다.

 

 1964. 8. 3 정부와 국회는 공산 침략에 직면한 자유월남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결정하였다. 해병대는 1965. 9. 20 제2여단 청룡부대를 창설하여‚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전투부대로서 최초로 이 부대를 외국 원정군으로 파월하였다.

1965. 10. 9 캄란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뚜이호아지구‚ 추라이지구‚ 호이안지구 전투를 수행하면서‚ 6년 4개월 동안 짜빈동 작전 등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조국의 명예와 해병대의 용맹성을 발휘하여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월맹군의 주요한 해상 침투로인 동시에 연합군의 최대 보급기지인 다낭 비행장과 월남군 1군 지역 배후에서 위협하는 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1966. 8. 16 북극성 작전을 전개‚ 추라이지구(쾅나이성)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황금‚ 비봉‚ 용안‚ 투망‚ 강구‚ 짜빈동‚ 뇌룡‚ 용머리‚ 테로이 매복‚ 용화 작전 등 수많은 작전을 수행하여‚ 추라이지구 내 전술 책임지역을 확보하였다.

특히 짜빈동 작전에서 월맹 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도 육박전‚ 역습 등을 실시하여 4시간 동안 사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적 사살 243명의 대전과를 올려‚ 월남전 사상 중대 규모로 최대의 전승 기록을 남겼다.

이 전투로 중대원 사병 전원이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고‚ 제11중대는 한 ·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상하였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최고 무공훈장(태극)의 영예를 안았다.

짜빈동 작전(1967. 2. 14. 23:20 ~ 1967. 2. 15. 07:24)은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1967. 2. 14. 23시 20분 손틴군 짜빈동에서 월맹정규군 제2사단 제1연대와 21연대 및 지방 게릴라 1개대대가 인해전술로 파상적 기습공격을 하였으나 제11중대 장병들은 전술기지에 구축한 외곽과 내곽방어선으로 연하는 교통호를 이용하여 일제 사격과 수류탄 및 크레모아 폭발로 침입하는 적을 격퇴하였다.

한때는 제3소대의 진지가 돌파되어 치열한 진내 육박전까지 전개하였지만‚ 지원화기의 적절한 운영‚ 역습부대의 과감한 공격으로 4시간의 사투끝에 적의 주력을 격멸하고 전술기지를 방어하였다. 이 전투결과 한국 해병대는 막강한 전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후 청룡부대는 월남 제2의 전략도시인 다낭과 호이안시를 연결하는 1번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월남 정부의 통제구역을 확장하였고‚ 미 해병대 제3 상륙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7. 12. 22 비룡작전을 전개하면서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호이안 지구의 최초작전은 1968. 1. 30 괴룡작전으로 월맹 정규군 제3사단의 대규모 구정공세에 따른 반격작전을 약 1개월 이상 실시하여 적을 격퇴시키고 호이안시 평정 및 다낭지역 적 위협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전술책임지역 내 적 섬멸을 위한 용진작전‚ 추수보호 작전을 전개하였고‚ 서룡작전‚ 포병대대 기지 방어 작전‚ 승룡‚ 황룡작전 등을 전개하여 지역 내 적을 98% 소탕하고 호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

1968. 5. 3 월남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열린 파리평화협정 결과에 따라 철군 계획이 발표되자‚ 1971년 4월부터 미국의 닉슨 독트린의 ‘월남전화 계획’에 따라 철군계획을 발표하여 제1차 1971. 12. 4 청룡부대를 제 2진으로 철수가 단계적으로 단행되면서‚ 1972. 2. 29까지 제5진의 마지막 철수가 이루어져 제2여단(청룡부대)이 개선 귀국하게 되었다.

건군사상 처음으로 해외 원정군으로 장도에 올랐던 제2여단(청룡부대)은 캄란만에 상륙한 이래 6년 5개월간 여단급 작전 66회와 대대급 작전 109회를 비롯하여 소부대 작전 15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한편‚ 8‚810톤의 구호활동 및 대민 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 지원‚ 1‚593동의 건설 지원‚ 450‚064명의 친선 활동 등 대민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3회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비롯하여 1회의 미 대통령과 월남 대통령의 부대 표창을 받았다.

 

2. 오늘의 해병대

 

가. 해군을 통해 본 해병대의 임무와 기능

 

 현행 국군조직법 제3조 2항을 보면 “해군은 해상작전 및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고 이를 위하여 편성 장비되고 필요한 교육훈련을 실시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동 제2조 2항에는 “국군은 육군, 해군 및 공군으로 구성하고,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고 규정되어 있음을 본다.

 한마디로 해군의 일부인 해병대는 해군의 양대 임무인 해상작전과 상륙작전 중 후자를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 운용되는 군사력인 것이다. 해병대는 결코 1973년 이전 같이 국방부 와 직거래한 해군의 외청 개념으로서 존재했던 육해공군 및 해병대란 준 4군종체제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해군의 6대 역할이 있는데, 여기에 해병대의 역할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4)군사력 투사(SEA POWER PROJECTION)이고 함축적인 해석이 가능 한 것은 (1) 전쟁억제라고 하겠다. 해군에서는 (1)을 해군력(상륙군 포함)이라고 표명해야 합당한데 그렇게 하지 않음은 아직도 NAVY- MARINE TEAM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실제로 우리의 잠재적 상륙가능력이 적의 휴전선 투입 병력의 후방연안 신장배치를 강요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1) 전쟁억제 :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함으로써 적의 전쟁 도발을 억제하는 것. 

 (2) 해양통제 : 필요한 시간과 해역에 대해 적의 사용을 거부하고 아군의 사용을

보장하는 것.

 (3) 해상교통로 보호 :아측 상선의 이동로(SLOC)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4) 군사력 투사 : 바다로부터 상륙군, 항공기, 유도탄, 함포 등으로 지상에 군사력을

투입하는 것.

 (5)  국가 대외정책 지원 및 국위 선양 : 국제 평화유지, 함정 외국 방문 등 국위선양

해양탐색 및 구조 활동, 어로 보호 지원.

 (6) 기타 :해상테러/해적행위 차단, 해난구조 및 해양오염 방지 등.

 

 국군조직법 상 해군의 양대 임무가 해상작전과 상륙작전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작전을 위한 가용 상륙군이 2개사단(+)인 현실을 외면한 채, 해군 함대의 수상함 중 상륙함 세력은 1개 연대를 lift하기에도 부족한 현실이고, 상륙작전을 위한 기타 함안이동, 항공, 함포, 및 해안지원 소요는 절대부족인 바, 해군의 역할 기술에 있어서 해병대의 존재가치가 등한시되고 있음은 불가피한 여건이다.

 1973. 10. 10 경제적 군 운용 목적으로 해병대사령부 및 교육‚ 군수지원 부대가 해체되고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된 해병대는 전력 관리상 문제점이 노출되어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기구인 해병대 사령부를 1987. 11. 1 재창설 하였다.

하지만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에 따른 권한과 책임사상이 법적으로 보완되지 못하여 해병대 인력 관리사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을 보고하고 법률 제정을 추진한 결과‚ 1990. 8. 1 국군조직법에 해병대 관련사항을 재 입법화함으로서 부대령 부대와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 부대로서 해병대 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따라서 해병대사령부는 해군작전사령부와는 기능이나 격이 다름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1992. 12. 1 해병대 부대를 상륙작전 위주로 운영하고 모든 예하부대를 지휘하여 연합사 전략예비부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연합해병대사령부(CMFC)가 창설됨으로‚ 제1사단과 제6여단의 작전권을 포함한 지휘기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즉 연합해병대를 창설함으로서 국가보위의 핵심전력으로써 평시에는 상륙전력을 구축, 전쟁을 억제하고 유사시에는 적 후방에 강력한 상륙전력을 투사하여 전승에 기여 국가정책을 지원한다. 이 전략개념이 한미연합사 작계 5027애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연합사가 불원간에 해체되고,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대 제3사단이  타지역으로 전환배치될 경우엔 한미연합해병대사령부도 해체될 것이다.

 그런데 1987. 11. 1 재창설된 해병대사령부는 해군본부 부속건물인 기지병원을 개축하여 사용하던 중 1988. 4. 15 재경부대 교외 이전계획에 의거‚ 경기도 서해안으로 해병대 사령부 이전을 결정하고 52개 지역을 대상으로 33회 검토하여 현 위치인 화성군 봉담읍 형제산 하록에 사령부 위치를 결정한 후 백년대계의 이전사업을 추진하였다.

 해병대 사령부 신청사는 1992. 4. 1 기공하여 1994. 4. 6 준공‚ 이전함으로써 해병대 전통정신을 계승하고 미래지향적인 해병대 역사를 창조하는 요람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90. 9. 29 공포된 해병대 직제령(대통령령 제 13‚113호)에 따라 해병대 사령부의 임무가 명시되었지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실질적인 지휘기능이 보장되지 않아‚ 1993년도 해병대사령부 내 해병대 현안과제 연구팀을 발족시켜 작전 및 부대 지휘에 따른 문제점을 해본에 건의하였고‚ 현역과 예비역의 노력과 성원에 힘입어 1997년 12월 해군 본부와 국방부에 해병대 지휘관리체제 개선위원회가 구성되어 1999년 1월 21일 해병대 사령관이 해병대 부대를 지휘하도록 법령 및 규정을 개정하였던 것이다..

 조직 및 정원에 관한 통칙‚ 해병대 직제령‚ 군 인사법시행령‚ 국방기획관리‚ 예산 및 군수품 관리‚ 국방보도 규정‚ 군무원 인산 관리 지침‚ 예비군 실무 편람 등에 대한 법령 및 규정을 개정하여 해병대사령관에게 위임함으로써‚ 미래전에 대비한 다목적 신속 대응군으로서 해병대 위상을 제고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해병대의 상륙전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뒷받침하기 위한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는 불완전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인사관리상의 불평등 및 불공평성이 상존하고 있다. 해병대 사령관의 위상이 3성장성으로서 국군최고위직이 되도록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하고 있으며, 해군본부와 해군 육상부대 그리고 국방부와 합참 및 국방부 직할부대와 기관의 해군직위를 해병대에게 안배하지 않고 있어 해병대 고급장교의 경력관리 및 승진이 봉쇄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음도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해병대 자체의 장교획득 출처별 부당 인사처리도 문제이다. 소수의 해군사관학교 출신만이 조직 피라밋의 상부계층을 독점하는 모순을 빚음으로서 비사관학교 출신과 사관학교 출신 간의 상호간 선의의 경쟁을 통한 개인 경력 발전이 불가능한 폐쇄적 불공정 시스템은 해병대의 전통을 와해시키고 조직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작용을 하고 있지 않은지 유념해야 할 것이다.

 

나. 고유한 해병대의 상징 - “해병문화”

 

(1) 해병대 마크


  

  싸움터 어느 곳에서나 영광을 쟁취하였던 해병대를 상징하는 ‘해병대 마크’ 는 해병대 조직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심지어 예비역들 까지도 이 마크를 지극히 애용하여 생활용품과 개인 장식물 그리고 차량에 부착하고 다닌다. 해병대 마크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항상 충실한 해병이 되자”는 좌우명과 더불어 현역과 예비역의 상징과 이미지가 되고 있다.

창설초기에는 해병대 마크가 제정되지 않아 해군장교 모표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1951년 8월1일 별도의 해병대 모표를 제정하게 되었다.

모표는 장·사병용으로 구분하여 장교용은 독수리와 별은 은색‚ 닻은 금색이며‚ 사병용은 전 부분을 금색으로 하여 구분하였다.

해병대 마크는 자신이 해병임을 항상 자랑스러워하면서 해병대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명예심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군대의 위치를 알리고 장병의 사기를 북돋우며 군대의 명예와 단결을 상징하기 위한 군기(軍旗)인 해병대기 중앙에 새겨지며‚ 제복의 어느 한 부분에 압인하거나 배지로 제작된 것을 부착하며 또는 간행물 표지에 표시하기도 하고 스티커로 만들어 차량에 부착하는 등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이러한 해병대 마크는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용맹스럽게 적과 싸워 승리하는 해병대를 상징한다.

마크는 리본(‘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독수리‚ 별‚ 닻 등 네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표는 리본이 생략된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마크의 각 부분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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