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3연대 1대대
본부중대 하사관 침실(하침)에서 첫날밤을 지새우고
포항 근무의 첫날은 대대장, 중대장, 통신관에 대한 전입신고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사단은 3, 5, 11연대 등으로 편제되어 3연대가 선임 연대이었으며
[3연대가]가를 매주 월요일 과업 정열 시 힘차게 부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조국의 정의자유 힘으로 탈취하는
해병대 굳게 뭉친 그 깃발 여기 있다
이루고 뭉치고 나가 창파를 뚫고 가는
최강의 그 이름은 3연대 나간다!!
<3연대 1대대 기재실 앞에서>
배속과 동시에 1대대 통신대에서 내가 처음으로 실무에서의 한 일은
통신병들에 대한 무전기 사용교육이었다. 진해 통신교육대에서 기재반장을 담당하였다고
하여 통신관이 나를 지명하여 교육을 지시하였다. AN.PRC-8,9,10에 대한 제원,
송*수화 시의 밧테리 소모량 등을 설명한 기억이 생각난다.
3연대 1대대는 부라보 대대로 그해 12월중에 해안방어에 투입되었다.
내가 배속된 곳은 1중대 63소초본부로 지금의 감포읍 오류리 부근이었다.
나의 직책은 소대 관할 통신하사로 218기 통신병과 같이 1소대 관할 4개 초소의
유선 수리업무를 수행하였다. 해안방어는 일출 전에 부대교체가 완료되기 때문에
이른 새벽 대대를 출발한 나는 63소초 행 트럭에 탑승하여 목적지로 출발하였다
한참을 가다 탑승한 트럭 안을 두리번거리니 어디서 낮 익은 해병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고등학교 동창이 아닌가? 해병대 입대후 세 번째 만나는 동창생이었다.
신병 228기 이철수 해병이 바로 그였다. 소초에서 같이 근무한 우리는 각별한 정을 나누고
해안 철수 후에도 대대 PX에서 종종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나의 동창이자 같은 해병이었던 228기 이철수는 그후 나보다 먼저 전역, 결혼하여
달콤한 신혼기간 중 불행하게도 집들이 왔던 친구들을 배웅하며 택시를 잡아주다
빗 길에 과속으로 달려오던 차에 치여 사망하였다.
236기 김원준 해병, 228기 이철수 해병 나의 동창이자 전우인 이들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해안방어 중에 있었던 기억으로는 소대 선임하사한테 받은 기압이 지금도 생각난다.
유선수리가 나의 직책이라 해안에서의 유선수리는 24시간 때를 가리지 않고 계속된다.
소대관할 65초소에 하교 90기 민완기 하사가 근무하고 있어 우리는 자주 만나 동기애를
나누었다.
어느 밤 나는 유선수리를 마치고 그와 같이 인근 가계에서 밤새도록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며칠 후 이 사실이 보고되어 선임하사로부터 실무에서의 호된 첫 기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압은 빳다로 시작되었는데 이미 하교에서 5파운드로 단련된 나의 히프가 전혀 반응이
없자 선임하사는 더욱 흥분하여 빳다를 집어던지고 가죽장갑을 끼더니 권투선수로
돌변하였다.
훅, 바디공격, 킥복싱 등 시련의 한 순간 이었다. 이미 각오를 하고있던 몸이지만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힘들고 괴로우면 즐거운 때도 있는 법!
해안방어시의 즐거움은 무었 보다도 싱싱한 동해의 해산물의 먹거리 시간이었다.
63소초 앞에는 바위가 많아 해삼, 멍게, 문어, 미역들이 풍부하였다.
그 중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홍삼, 문어이다. 당시 홍삼은 전량 일본에 수출되던
비싼 해산물이었는데 알 철모에 가뜩 채워와 소초에서의 회식은 잊지를 못한다.
해안방어 중 당시 사회의 사건 사고로는 그 유명한 대원각 호텔에서 크리스마스날
화재사건 이었다.
해안방어를 끝내고 복귀한 부대는 본격적인 교육훈련에 돌입하였다
한,미 연합 상륙훈련으로 도구에서 LST에 승선한 1대대는 동해안에서 며칠을 보낸 후
양남 부근의 해안에 상륙, 울산을 경유하여 삼태봉, 조향산 토함산 등
경주일원의 산악지대를 이동하는 긴 여정의 훈련이었다. 이 기간 중 기억나는 것은
모화리 앞산 삼태봉에서 모화역 부근의 주막까지 그 먼 길을 내려가서
또 한차례의 막걸리 조달과 모화 역에서 육군 3사 생도를 만나 일장훈시를 하고
막걸리 값을 대신 치루게 하였다.
<한미연합 상륙훈련>
상륙작전 훈련이 끝난 72년 3월부터 사단은 초 비상사태에 돌입하였다.
그 해인 72년 4월 15일은 북한 김일성의 회갑이며 해병대 창립 기념일이기도 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호기로 잡고 회갑잔치를 부산에서 하겠다고 호언장담하여
한반도가 전쟁의 일촉즉발이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1대대는 3월부터 매일 밤이 되면
도구해안에 정박한 상륙함에 승선 대기하는 훈련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우려하던 전쟁은 없고 우리의 원산 상륙작전은 자동적으로 취소되었다.
이 당시 나는 앞에서 말한 국민학교 1년 선배인 228기 이영순(11연대),
241기 유영상(앵그리코 중대)와 토요일 오후에 활주로를 통과하여 공항식당에서 만나
한 잔의 술과 식사로 동창회를 여러 번 하였다.
지금은 포항공항이 사단과 완전히 격리되었지만 당시에는 북문을 통하여 항공기 승객이
출입하였고 공항 내 식당의 손님은 해병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공항식당은 가격도 싸고 맛이 좋아 종종 이용하였는데 이곳을 출입할 때 활주로를 무단으로
통과하여 지름길로 갔는데 활주로 통과를 헌병대에서 엄격히 단속하였지만
그래도 단속을 피해 공항식당을 이용하였다.
다시 각종훈련이 반복되고 그해 초여름 1대대는 해안 알파 대대로 해안방어 임무에
다시 투입되었다. 나는 구룡포 중대 지금의 대보 장기곷 등대 소초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72년의 긴 여름을 보낼 줄은 상상을 못하였다.
<해안방어 중 대보 등대에서>
그것은 71년 12월말 일촉즉발의 남북대치 상황에서 김포여단의 병력증강을 위하여
3연대 3대대가 김포로 이동한 후 신설된 5대대가 1대대의 해안방어 임무를 인수하며
내가 5대대로 전출되어 장기곶 소초에서 계속하여 근무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곳에서 연 이어 해안방어를 두 번 하는 것은 희귀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는 그곳 마을에서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타게 되었으며
특히, 제주해녀 마을처녀들과 어렵지 않게 어울릴 수가 있었다.
<제7부 3연대 5대대로 계속>
출처 :김종훈 부사관 90기 글